陳玉鍊
陳玉鍊1860 ~ 1944. 11.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3)
관련 사건
- · 대구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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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2003)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 부계면(缶溪面) 동산동(東山洞) 출신이다. 1919년 7월 3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1850년생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1919년 8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는 60세, 즉 1860년에 태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생으로 영남 유림의 태두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鐘錫)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곽종석은 김복한(金福漢)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다. 김창숙(金昌淑)이 2,674자에 이르는 장문의 글을 작성하고,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유림 137명이 장문의 글에 연서하였다. 김창숙이 작성하고 유림들이 연서한 탄원서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되었으며, 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 참석차 파리로 갔던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金奎植)에게 유림들의 탄원서를 전달하고, 그 인쇄본을 파리, 중국, 조선에 배포하였다. 그런데 파리장서에 서명했던 송회근(宋晦根)이 4월 2일 상주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일제 군경은 송회근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탄원서 작성 및 서명, 그리고 그 탄원서가 상하이(上海)를 거쳐서 파리로 전달된 사실을 확인하였다. 파리장서의 존재를 확인한 일제 군경은 4월 18일 파리장서를 주도한 곽종석을 붙잡았다. 이를 전후로 파리장서에 서명한 20명의 유림들이 일제 군경에 붙잡히게 되었다. 일제 군경의 가혹한 심문에도 불구하고 유림들은 탄원서에 서명한 인사들의 존재를 함구하였다. 그후 1919년 6월 일제 군경은 임시정부에서 각 지역의 향교로 발송한 파리장서 한문본을 입수하였다. 그로 인해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명의 신원이 확인되면서, 일제 군경은 이들에 대한 검거에 나섰다. 인편을 통해서 스승 곽종석이 대구형무소에 투옥된 사실을 전달받고 이에 분노하였다. 그리고 4월 26일 곽종석의 동정을 확인하기 위해서 대구로 향하였다. 그날 오전 10시경 마을 입구에서 구장을 지낸 친구 아들인 홍연구(洪淵九)를 만났다. 홍연구에게 스승 곽종석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서 대구로 간다고 전하면서, 마을 사람들을 규합해서 부계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할 것을 권유하였다. 홍연구는 만세시위를 일으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면서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일제 군경은 홍연구에게 만세시위를 제안한 사실을 파악하였다. 이에 만세시위를 권유하고 선동한 혐의로 붙잡아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7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1919년 8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원심이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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