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근
姜京根미상 ~ 1924. 5. 1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5)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곽산면(郭山面)에서 출생하였다. 출생 연도와 가족관계, 성장 과정 등은 자료의 한계로 알기 어렵다. 1924년 중반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독립군단(獨立軍團)인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참의부는 1924년 5, 6월경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제 1·2·3·5 중대 및 유격대, 독립소대가 분리 이탈해 성립한 독립군단이다. 1920년 10월부터 서북간도(西北間島)를 침략한 일본군의 공격으로 독립군 기지와 이주 한인 사회는 초토화되었다. 이듬해 4월까지 이어진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이라 불리는 일본군의 민간인 학살로 인해 3,700여 명의 한인이 살해되었다. 또한 수많은 가옥과 학교 등이 파괴되거나 소각되었으며, 수만 석의 양곡이 불타 없어져 삶의 기반이 송두리째 무너졌다. 통의부는 이 같이 참담한 현실을 이겨내고자 남만주(南滿洲)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1922년 8월, 17개 단체를 통합해 성립시킨 독립운동 단체다. 통의부는 이주 한인 사회를 복원하기 위한 자치활동과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 무장 활동을 병행해 수행하였다. 권업부(勸業部)·학무부(學務部) 등의 부서를 중앙 조직에 편성해 한인들의 삶을 지원하고, 파괴된 학교를 복원해 2세 교육을 이끌었다. 그 결과 한인 사회는 점차 본모습을 찾아갔다. 그런데 한인 사회가 안정되어 가는 것과 비례해 항일 무장 활동을 노선(路線)으로 하고자 한 세력의 불만이 커져갔다. 자치활동에 치중한 지휘부 노선에 불만을 품은 의용군 제1중대장 채찬(蔡燦, 이명 백광운(白狂雲))과 김원상(金元常) 등은 1923년 말, 상하이(上海)의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이들은 임시정부 인사들과 협의한 끝에 산하에 독립군단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남만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신들과 뜻을 같이하는 통의부 의용군 일부를 이탈시켜 참의부를 성립한 것이다. 자치와 무장 활동을 병행한 통의부에서의 행적은 찾기 어렵다. 하지만 참의부 성립 초기인 1924년 중반의 활동 기록은 밝혀져 있다. 따라서 참의부 구성원 대부분은 통의부 의용군이 옮겨와 편성되었기에 통의부에서도 활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무장 활동을 노선으로 한 참의부는 성립 초기부터 군사적으로 편제하였다. 제1중대부터 제5중대까지 5개 중대와 특수부대인 독립소대, 그리고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훈련대를 갖추었다. 이외 독립군의 재정 및 행정을 지원할 민사부와 한인 사회의 민의를 반영할 중앙의회(中央議會)가 설치되었다. 초대 참의장은 설립을 주도한 채찬이 선임되었는데, 그는 제1중대장까지 겸하였다. 본부는 국내 진입이 쉬운 압록강변의 지안현(輯安縣)에 설치하였고, 각 중대는 국경 지방과 가까운 환런(桓仁)·퉁화현(通化縣) 등에 분산 배치되었다. 이러한 참의부의 제1중대 소속의 독립군이 되었다. 설립 초기인 1924년 5월 초 국내 진입 작전을 위해 편성한 유격대의 일원이 되었다. 5월 10일 진영을 출발해 압록강변으로 이동하던 중 지안현 옥석하(玉石河)에서 중국 관군을 만나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독립군을 지원하는 중국 관군도 많았으나, 일제의 사주를 받은 일부는 한국 독립군을 공격하고 또 체포해서 일본 군경에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소수의 인원으로 편성된 유격대였기에 중국 관군과 접전하기에는 대단히 불리하였다. 결국 이 전투에서 동료 계동화(桂東化)와 함께 총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채영국⋮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