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學奎
鄭學奎1893. 9. 11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7)
관련 사건
- · 인산면 만세시위(1919.3.31
- · 4.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7) 1893년 9월 11일 황해도 평산군(平山郡) 인산면(隣山面) 기린리(麒麟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면서기였으며, 3월 31일 인산면 기린리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 등지에서 일제히 만세운동이 발발하였다.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에 민족대표였던 천도교주 손병희(孫秉熙)는 평산군에 거주하는 이동락(李東洛)에게 평산군 일대에서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서 만세시위를 일으키도록 지시하였다. 3월 2일 이동락은 평산군에 도착하지만, 일제 군경으로부터 거주제한을 당하고 엄중하게 감시 당하였다. 그러자 이동락은 금천군의 천도교인 강창선(姜昌善)을 통해서 비밀리에 평산군의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3월 7일 평산읍 장날을 맞이하여 평산군 천도교도는 장터를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다음날인 3월 8일에도 평산군 사람들은 평산읍 장터를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제 군경은 평산 읍내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함과 동시에 평산군 내 시위 확산을 차단하기 위해서 감시를 강화하였다. 3월 말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평산군에서도 만세시위도 재개되었다. 3월 30일 평산면의 은담리(隱潭里)와 빙고리(氷庫里) 일대에서는 ‘대한국독립만세(大韓國獨立萬歲)’라는 문구가 적힌 전단이 발견되었다. 3월 31일 장날을 맞이하여 인산면 기린리와 금암면(金岩面) 한포리(汗浦里)에서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31일과 4월 1일 기린장 시위라고 일컫는 인산면 기린리의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기린장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31일 오후 1시경 인산면과 상월면(上月面) 주민들과 개신교인으로 주로 구성된 150~600여 명의 시위대가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인산면 면서기 서홍균(徐洪均)·엄윤영(嚴允榮)·김예식(金禮植)·김두우(金斗牛)·서용하(徐用河)·신만균(申萬均)·조봉성(趙鳳成)과 함께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일제 군경은 기린장 만세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대 1명이 사망하였다. 일제 군경에게 인산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붙잡아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해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7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았다. 그러자 “만세시위 참여한 이유는 조국의 자유 독립을 갈망하고 일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민족적 염원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으며, 세계 대세에 의해서 동양의 평화와 인류의 평등복지를 바라는 뜻에서 조선독립만세를 불렀다”면서 상고하였다. 하지만 그해 9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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