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正仁
趙正仁1874 ~ 1909. 1. 18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호남창의회맹소
- · 김태원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독립장(1977)
관련 사건
- · 후기의병(김태원 의병부대)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77) 전라남도 나주군(羅州郡) 서부면(西部面) 명당(明堂)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8년 당시 35세이므로 1874년생으로 추정된다. 1907년 이후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 선봉장 김태원(金泰元)과 함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기삼연(奇參衍)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자 조카로 1896년 의병부대를 일으키고 활동하였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대한제국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당하자, 기삼연은 그해 9월 전남 영광(靈光) 수연산(隨緣山)의 석수암(石水庵)에서 다시 거의한 후 호남창의회맹소를 결성하였다. 1907년 12월 김태원과 함께 수백 명의 의병들을 모집한 뒤 400여 정의 총기로 무장하고, 전남 나주·함평(咸平)·장성(長城)·광주(光州)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김태원과 함께 자체적으로 탄환을 제조하는 등 비교적 무장을 잘 갖춘 의병부대를 이끌고 일제 군경과 치열하게 교전하면서 전과를 올렸다. 또한 의병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군자금 모집 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1908년 3월 광주군 동각면(東閣面) 심산촌(沈山村)에서 일본군의 추격을 따돌리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어서 1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항일투쟁을 지속하다가, 같은 해 6월 15일 함평군 해보면(海保面) 신성리(新成里) 부근에서 나주분견소 일제 헌병에게 붙잡혀 재판에 넘겨졌다. 1908년 10월 21일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내란죄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1월 28일 대구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12월 15일 대심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09년 1월 18일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노상균⋮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