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락
金大洛1845 ~ 1915. 12. 1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협동학교
- · 신민회
- · 신흥학교
- · 경학사
- · 공리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경학사
- · 대한협회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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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45년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천전리(川前里)에서 김수일(金守一)의 후손으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낸 김진린(金鎭麟)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우는 효락(孝洛)·소락(紹洛)·정락(呈洛)이고, 매부는 안동 법흥(法興)의 이상룡(李相龍), 봉화 법전(法田)의 강면(姜沔), 안동 하계(下溪)의 이중업(李中業)이다. 본관은 의성(義城)이고, 자는 중언(中彦), 호는 비서(賁西)이다. 서간도로 건너가 백두산 기슭인 류허(柳河)현 삼원보(三源堡)에 정착하였다고 하여 백하(白下)라는 별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퇴계학맥을 계승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한 종조부 김헌수(金憲壽)와 종숙부 김진기(金鎭麒), 그리고 족형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895년 안동의병부대가 결성될 때 부친 김진린이 작고하여 상중에 있었으므로 직접 참가하지 못하고 후원하였다. 1907년 류인식(柳寅植)·김후병(金厚秉)·하중환(河中煥) 등이 안동에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려 하자 문중의 원로들과 함께 신교육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듬해 1908년 매부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신문화를 수용하여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安東支會)를 설립하자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를 읽은 후, 「독대한협회서유감(讀大韓協會書有感)」이라는 글을 짓는 등 생각이 크게 변화하였다. 1909년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사용되던 가산서당(可山書堂)이 학생 수의 증가로 인해 협소하게 되자 자신이 살던 50여 간의 가옥을 출연하여 교실과 기숙사로 사용하도록 하고 작은 집으로 물러났다. 이에 『황성신문(皇城新聞)』에서는 「교남교육계(嶠南敎育界)에 신적치(新赤幟)」라고 대서특필하여 신교육의 보급에 헌신하고 있다고 칭송하였다. 그 후 협동학교 운영에 앞장을 서 안동 지방의 개화에 크게 영향을 주었고, 또 협동학교 교장을 맡았던 종손 김병식(金秉植)과 더불어 문중 개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김동삼(金東三), 이상룡 등과 함께 신민회(新民會)의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 계획에 호응하여 조국을 떠나기로 결단하였다. 1910년 12월 24일 66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고향인 천전리를 떠나 1911년 1월 15일 화이런(懷仁)현 항도촌(恒道村, 지금의 橫道川)에 도착하였으며, 심택진의 집에서 이상룡 등과 함께 약 2개월간 머무르면서 한만관계사(韓滿關係史)를 연구·집필한 뒤, 4월 19일 삼원보 이도구(二道溝)에 들어갔다. 이때 함께 망명한 사람들은 문중의 청장년을 비롯하여 만삭인 손부, 울진군(蔚珍郡) 평해면(平海面) 사동리(沙銅里)로 출가한 손녀와 손서 황병일(黃炳日), 그리고 황씨 문중黃氏門中의 황호(黃濩)를 비롯한 황만영(黃萬英)·도영(道英)·의영(義英) 등의 인사들이었다. 1911년 류허현 삼원보 이도구에 정착한 뒤, 1911년 5월 22일 설립된 추가가(鄒家街)의 신흥학교(新興學校) 교장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신흥학교는 1912년 6월 7일 합니하(哈泥河)로 이전하였고, 1913년 5월 학교명을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로 개칭하였으며, 1919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발전하였다. 1911년 6월 22일 이상룡·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 등과 함께 경학사(耕學社) 설립에 참여하였다. 1912년 2월 퉁화(通化)현 합니하로 이사하였다가, 1913년 2월 삼원보 남산(藍山)으로 돌아오니, 경학사가 해체된 뒤였다. 이리하여 한국 교민 사회에 새로운 자치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13년 경학사를 계승한 공리회(共理會)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그가 작성한 「공리회취지서(共理會趣旨書)」에 의하면, 공리회는 ‘도(道)와 덕(德)’이 중심이 된 유교적 이상 사회이면서 ‘새로운 자유와 평등’의 시대관이 담긴 대동 사회를 목표하였다. 공리회는 1916년 부민단(扶民團), 1919년 한족회(韓族會)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경술국치 이후 서간도로 건너가 독립운동 기지 건설과 이주 한인들의 정착을 위해 헌신하다가 1915년 12월 11일 삼원보 남산에서 작고하였다. 향년 71세였다. 단, 다른 기록에는 1914년 12월 10일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묘는 류허현 삼원보 남산 뒷산에 있었으나,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저술로는 『백하일기(白下日記)』 3책과 그 아들 월송(月松) 김형식(金衡植)이 엮은 『선고유고(先考遺稿)』가 있는데, 『선고유고』에는 「권유문(勸諭文)」·「통분가(痛憤歌)」·「공리회취지서(共理會趣旨書)」·「독대한협회서유감(讀大韓協會書有感)」·「대동역사서(大東歷史序) 등과 많은 시문(詩文)이 수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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