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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곤

金達坤

1873. 2. 12 ~ 1922.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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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김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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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성주(星州)만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성주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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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5)

관련 사건

  • · 국채보상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5) 1873년 2월 12일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성주면(星州面) 백전동(栢田洞)에서 김용락(金容樂)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고, 자는 덕겸(德謙)이다. 1907년 1월 29일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자 같은 해 3월 20일 성주에서도 성주군국채보상의무회(星州郡國債報償義務會)가 설립되었고, 회장으로 이승희(李承熙), 부회장으로 이덕후(李德厚)가 추대되어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회장 이승희가 발표한 「성주군의무소국채보상취지서(星州郡義務所國債報償趣旨書)」에서는 헌금을 국민의 당연한 도리로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보국(報國)할 것을 역설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매우 가난하여 노동으로 노모와 동생을 부양하면서도 성주에서 국채보상에 대한 연설을 듣고 귀가하여 동생에게 부탁하기를 ‘국채를 갚으면 대한 강토를 공고히 하고 국민 자격을 회복한다 하니 국채를 갚기 전에는 너는 모친을 받드는데 힘쓰고 나는 나무를 해서 국채를 보조하기로 결심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날부터 장날마다 나무를 팔아 엽전 한 냥 혹은 두 냥을 보상금으로 의연하여 합계 7냥을 기부하였다. 이에 성주의무소가 사람을 시켜 탐지한 결과, 가세가 빈한하고 노모를 모시는 것을 파악하였다. 그 의로운 생각에 감사하고 가져온 돈을 가져가 모친을 봉양하는 데 쓰도록 권유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재정가들이 수전노가 되어 나라 형편이 어찌되는지를 잊고, 도처의 부유한 사람들이 기백(幾百) 원 기천(幾千) 원을 의연했다 칭하고 생색을 내는 사람을 보면 심히 부끄러워지노니, 나는 비록 빈핍(貧乏)하나 내 자본은 산에 있은 즉 풍족하니라. 몇 냥 몇 푼으로는 국채 거액에서 보면 하해(河海)의 한 방물 물이나, 나 역시 나라의 음덕으로 자라난 몸이라 국민의 사상을 표하고 싶었을 뿐이니 더 이상 말하지 마시오’라고 단호히 말하니 좌중의 부유한 사람들은 얼굴을 붉혔다고 한다. 이와 같이 4월부터 7월까지 나뭇짐을 하여 마련한 30냥을 모두 국채보상금으로 출연하였다. 1911년 1월 5일 자하(紫下) 장기석(張基奭)이 일제의 통치를 거부하고 옥중에서 단식·사망하자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평소 절개가 굳어 일제의 통치를 거부하여 세금납부(稅金納付)와 부역(賦役)을 거부하여 일본 경찰에 호출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다가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4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전 재산 500원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1922년 9월 5일 서거하자, 사람들은 그를 ‘의사(義士)’라 불렀다고 한다. 묘는 성주읍 용산리(龍山里) 뒷산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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