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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翰景

鄭翰景

1890. 2. 28 ~ 1985.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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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鄭翰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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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순천(順川)미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평안남도 순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관련 단체

  • · 한인소년병학교
  • · 신고려회
  • · 대한인국민회
  • · 구미위원부

포상 정보

  • · 독립장(1962)

관련 사건

  • · 위임통치청원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2) 1890년 2월 28일 평안남도 순천(順川)에서 태어났다. 부친 및 주변 친지와 미국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1904년 미국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로 건너갔다.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로 가서 미국인 가정의 스쿨보이(가정부)로 1년을 머물렀다. 1905년 박용만(朴容萬)의 주선으로 네브라스카주(State of Nebraska)의 커니(Kearney)로 옮겨 학업을 시작하였다. 1909년 여름부터 박용만이 주도한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의 첫 훈련이 시작되자, 커니 및 헤이스팅스(Hastings)에 거주하는 학생들과 훈련에 참가하였다. 1911년 8월 1회 졸업생 중 한 명이 되었다. 이후 1913년 커니 고등학교, 1915년 네브라스카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네브라스카대학에서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18~1919년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Northwestern Univeristy)의 연구원·조교수로 재직하였으며, 이승만(李承晩)·민찬호(閔贊鎬) 등과 한인동지회(韓人同志會)를 조직하였다. 프랑스 파리(Paris)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김규식(金奎植)과 신고려회(新高麗會)를 조직하여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을 피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로부터 소약국동맹회의와 파리평화회의 대표 자격을 부여받았다. 소약국동맹회의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약소국과 속국 그리고 억압받는 민족들이 국제사회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위한 목적으로 1918년 12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회의이다. 기독교계 인맥을 통해 미국 정치가들을 상대로 한국의 독립을 공론화하는 한편, 신문지상에 성명서를 발표하여 미국인의 성원을 얻고자 하였다. 「북미합중국의 동양정책(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과 「평화회의(The Peace Conference)」 등의 글을 저술하여 한국 독립의 불가피성을 역설하였다. 이승만과 함께 파리평화회의 참석을 하고자 하였으나 미국 정부는 이들의 출국 허가를 거부하였다. 1919년 2월 중순 윌슨(Thomas Woodrow Wilson) 대통령에게 청원서를 전달하여 한국 문제를 미 의회 안건으로 다뤄줄 것을 호소하였으나, 윌슨과의 면담 요청은 거부되었으며 편지조차 전달되지 않았다. 그해 2월 25일 「위임통치청원서」를 작성하였고, 이승만은 3월 6일 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윌슨에게 보냈음을 밝혔다. 청원서는 ‘미국·하와이·멕시코·중국·러시아에 거주하는 150만 한국인을 대표하는 대한인국민회 집행위원회’의 위임으로 제출되었으며,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돕기 위하여 거중조정자가 되어 달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일제의 학정으로부터 한국을 구출하고 장래의 독립을 보장하라’고 열강에 요구하였으나,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통치 아래에 두자’는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1919년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고 그해 4월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이승만·서재필(徐載弼) 등과 한국의회(Korea First Congress)를 조직하였다. 4월 16일부터 3일 동안 대한인국민회 간부들을 중심으로 필라델피아의 독립기념관에서 대한독립선언식을 거행하는 자리에서 애국성금 30만 달러를 모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20년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담당하는 구미위원부 장관에 임명되었고, 그해 5월 현순(玄楯)이 구미위원부 위원장 겸 주미대사로 발령받자, 선전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10월 호놀룰루(Honolulu) 교민들의 초청으로 태평양회의 한국대표 자격으로 이승만을 대신해 독립운동과 민족정신에 대해 연설하였다. 1921년 9월 이승만·서재필과 워싱턴 군비축소회의에 파견되었으나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워싱턴회의에 참석하기 전에는 하와이세계기자대회에 출석하여 하와이 한인들에게 독립정신을 독려하였고, 워싱턴회의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1921년 워싱턴D.C의 아메리카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논문 제목은 「한국 사정(The Case for Korea)」으로 한국의 역사와 정치관계를 알리고, 일제의 식민지배에 숨겨진 야만성을 폭로하였다. 이후 노스웨스턴대학에서 강사로 재직하였다. 1921년 5월 6일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들이 이승만의 퇴진과 임정 개조를 요구하는 5개 항의 결의서를 임시의정원 의장 윤기섭(尹琦燮)에게 전달하였다. 논쟁의 결과 1920년대 중반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떠났다. 이 무렵 이름을 Henry Chung De Young 으로 개명하고 정치활동을 중단하였다. 1923~1924년 네브래스카 링컨(Lincoln)의 한 식료품회사에서 일하였고, 사진사업도 하는 등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하였다. 1925년 서재필·유일한(柳一韓)·이희경(李熙景)과 유한주식회사 조직에 참여하였고, 1933년부터 식료품회사를 경영하며 14개 주에 납품하는 세일즈매니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저술활동과 정치활동을 재개하였다. 신문과 『아시아』 등의 학술지에 소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44년 5월 임병직(林炳稷)과 함께 임시정부의 전후구제회의, 태평양학회 등 국제회의 대표로 파견되었다. 그해 10월 20일 임시정부에서 구미위원부를 주미외무위원회로 개편하면서 위원 겸 비서주임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4월에는 샌프란시스코회 한국대표단원에 지명되었다. 광복 이후 1948년 2월 미군정의 민간인 직원으로 고용되어 귀국하였다. 그해 5월 총선거의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12월 초대 주일특사로 임명되어 1949년 2월까지 재직한 뒤 미국으로 돌아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곽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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