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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東祜

趙東祜

1892. 8. 4 ~ 1954.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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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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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沃川)국내항일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북도 옥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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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동제사
  • · 체화동락회
  • · 상하이고려교민친목회
  • · 신한청년당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 공산주의자그룹(상해)
  • · 한중호조사
  • ·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상하이지부
  • · 한국노병회
  • · 화요회(火曜會)
  • · 조선공산당
  • · 화요파 그룹(조동호 그룹)
  • · 조선민족해방연맹
  • · 조선건국동맹
  • · 건국준비위원회
  • · 조선공산당(장안파)
  • · 서울실업자동맹
  • · 민주주의민족전선
  • · 실업자동맹
  • · 사회노동당
  • · 근로인민당

포상 정보

  • · 독립장(2005)

관련 사건

  • · 조선공산당 탄압사건
  • · 부민관 투탄 의거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2005) 1892년 (음)8월 4일 충청북도 옥천군(沃川郡) 청산면(靑山面) 백운리(白雲里)에서 부친 조명하(趙明夏)와 모친 박빈(朴彬)의 3남 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호는 유정(榴亭)이다. 이명은 조동우(趙東祐)이다. 1896년부터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1901년부터 서당에 다니면서 훈장 엄덕수(嚴德洙)로부터 한학과 중국 고전을 배웠다. 1905년 4월 1일 청산면 지전리(地田里)에 청산사립신명학교(현 청산초등학교)가 개교하자 입학하여 3년 동안 수학하였다. 1908년 큰형 조동석(趙東祏)의 권유로 서울로 올라가 관립 측량학교(測量學校)에 입학하였고, 1905년 관립 우무학당(郵務學堂)을 마친 여운형(呂運亨)과 교류하게 되면서 큰 감화를 받았다. 당시 여운형 등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입교(入敎)한 것으로 보이며, 이후 일생 동안 함께 독립운동을 하면서 동지로 지냈다. 1910년 측량학교를 수료한 후 곧바로 측량기사로 일하였다. 1914년 12월 여운형과 함께 중국 유학길에 올라, 칭다오(靑島)·상하이(上海)·전장(鎭江) 등을 거쳐 난징(南京)에 도착하였다. 1915년 2월 초 진링대학[金陵大學, 현 난징대학(南京大學)] 중문과(中文科)에 입학하였다. 원래는 여운형과 함께 신학(神學)을 공부할 생각이었으나, 진링대학에 별도로 신학과가 없어서 중문과에 입학한 것이었다. 1917년 7월 진링대학을 졸업한 후 상하이에서 중국인 황자오(黃覺)가 경영하던 『구국일보(救國日報)』의 기자로 일하였으며, 이후 『중화신보(中華新報)』 기자를 겸직하였다. 진링대학을 졸업하기 전부터 상하이를 오가며, 1912년 7월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여 이사로 활동하였다. 1916년 9월 신규식 등 동제사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교민회(僑民會)의 성격을 띤 항일단체로 조직된 체화동락회(棣華同樂會)에 참여하였다. 한편 1918년 여운형·신석우(申錫雨) 등과 함께 상하이재류 500여 명 한인교포의 친목단체로서 상하이고려교민친목회(上海高麗僑民親睦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프랑스조계(佛蘭西租界) 지역을 중심으로 중국인 훵카이밍(黃介民)·우산(吳山) 등과 교류하였다. 1918년 6~7월 경부터 상하이에서 여운형·장덕수(張德秀)·김철(金澈)·선우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 등 주로 동제사의 소장층 인사들과 함께 매주 토요일마다 여운형의 집에서 정세토론 모임을 가졌다. 조만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것을 예측하고 장기전이 될 수밖에 없는 조선의 독립운동에 청년들을 조직화하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는 판단 아래 결집한 것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창당의 모체가 되었다. 신한청년당 창당 과정에서는 당의 취지서·당헌(黨憲)·당강(黨綱) 등을 작성하는 일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리자, 전후(戰後)의 강화회의가 조선의 독립운동에 절호의 기회가 될 것으로 판단하여 「독립청원서」 등을 준비하였다. 미국 대통령 윌슨을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목적으로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장덕수 등이 국문과 영문으로 이를 작성할 때 참여하였다. 1919년 1월 여운형 등 신한청년당원들과 함께 회합하여, 국내와 일본·만주·연해주 일대로 당원을 파견해 종교계를 비롯한 사회 각계의 지도자들을 통해 전 민족적인 궐기를 촉구하도록 하였다. 당시 『중화신보』 기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상하이에 남아 일본 도쿄(東京)에 있는 조소앙(趙素昻) 등 각지의 통신 연락 임무를 맡아 활동하였다. 같은 해 3월 말 여운형 중심의 신한청년당, 신규식 중심의 동제사 등이 합세하여 상하이 프랑스조계 바오창루(寶昌路)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여 활동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논의를 본격화시켰다. 당시 국내를 비롯해 일본·만주·연해주·미주 일대에서 여러 인사들이 상하이로 모여들어 협의를 거듭한 결과, 같은 해 4월 10일 정식으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이 설립되었으며, 이어서 「대한민국 임시헌장(大韓民國臨時憲章)」이 제정·선포되고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제헌의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임시의정원의 충청도의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해 6~7월 이원익(李元益)·김병조(金秉祚) 등과 함께 임시정부 산하 임시사료조사편찬부(臨時史料調査編纂部) 위원으로 일하면서, 한국 역사의 독립 실력과 한일관계 등을 상세하게 편사(編史)한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 전 4권을 완성하여 국제연맹에 제출하였다. 8월 21일에는 안창호(安昌鎬)·이광수(李光秀)·차리석(車利錫)·백성욱(白性郁) 등과 함께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獨立新聞)』 창간호를 발간하였다. 당시 직접 『성경(聖經)』에서 글자체를 따다가 한글 활자를 제조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1923년까지 『독립신문』의 기자이자 주요 필진으로 활동하였다. 12월 1일에는 국문과 한문으로 된 『신한청년』 창간호를 발행하는 데 관여하였다. 1920년 봄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공산주의자 그룹’이 결집될 때 참여하여 출판부 담당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미 1918년 5월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된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을 모체로 한 이 그룹은 민족독립을 우선시하는 정강을 내걸었기 때문에 여운형을 비롯해 이동녕(李東寧)·이동휘(李東輝)·신규식·김규식(金奎植)·최창식(崔昌植)·선우혁·신채호(申采浩)·노백린(盧伯麟)·조완구(趙琬九)·안병찬(安秉瓚)·이춘숙(李春塾)·양헌(梁憲)·윤기섭(尹琦燮)·김두봉(金枓奉) 등 당시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1921년 4월 상하이에서 우산·저우첸추(周劒秋)·셴중준(沈仲俊) 등 중국의 주요 인사들과 노백린·김규식·여운형·이유필(李裕弼)·신익희(申翼熙) 등 임시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한·중 친선 및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을 위한 상호협조를 목적으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조직하였다. 한중호조사는 이미 같은 해 3월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서 이우민(李愚珉)·황영희(黃永熙) 등이 중국 정치가들과 함께 처음 조직한 단체로 상하이에서 조직될 때 한국인 104명과 중국인 52명이 참가했을 정도로 규모가 컸으며 활동도 가장 활발하였다. 그래서 그해 8월부터 본부를 상하이에 두고, 청두(成都)·한커우(漢口) 등 중국의 주요 도시에도 지사들이 설립되었다. 1921년 당시 공산주의운동 내에서 이른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사이의 경쟁이 심해지자, 그해 5월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자 그룹’이 고려공산당(상해파)으로 개편될 때 참여하지 않고 한인사회당 세력과 결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김만겸(金萬謙)·여운형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상하이지부(上海支部)를 조직하고 책임비서를 맡아 활동하였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極東民族大會)에 여운형·김규식·김시현(金始顯)·최고려(崔高麗)·현순(玄楯)·김단야(金丹冶)·김원경(金元慶)·한명서(韓明瑞)·홍범도(洪範圖) 등과 함께 조선 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월 25일 이 대회에서 조선의 경제와 노동자 농민의 상태에 관한 보고를 하였다. 1922년 10월 28일에는 상하이 샤페이로(霞飛路) 바오캉리(寶康里)에 있는 조상섭(趙尙燮)의 집에서 여운형·김구(金九)·최석순(崔錫淳)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조직하였다. 한국노병회는 ‘10년 동안 1만 명의 노병(勞兵) 양성과 100만 원 이상의 전비(戰費) 확보’를 목표로 조직된 무장독립운동 준비를 위한 단체였다. 1923년 4월 2일 한국노병회 제1차 정기총회에 참석하여 교육부 부원에 임명되었고, 최석순 등과 함께 회계검사원으로도 활동하였다. 한편 1923년 1월 3일부터 6월 6일까지 무려 5개월 이상 계속된 국민대표회의가 독립운동전선의 결집을 이뤄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이 과정에서 같은 해 6월 2일 베이징(北京)에서 의장 윤해(尹海)·부의장 신숙(申肅)을 중심으로 비밀회의가 소집되어 새로운 정부로서 ‘조선공화국’이 수립되었다. 이때 김규식·조동호·한형권(韓馨權)·지청천(池靑天)·최동오(崔東玝) 등과 함께 30인의 국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 ‘조선공화국’은 거의 활동하지 못한 채 사실상 곧바로 해체되었다. 같은 해 9월 13일부터 15일까지는 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전후세계 상업의 추세’라는 논설을 게재하였다. 1923년 12월 국내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정태희(鄭泰熙)와 함께 귀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종로경찰서에 열흘 동안 구금되었다가, 동아일보사의 도움으로 12월 22일 풀려나 일단 고향으로 돌아갔다. 1924년 1월부터 『동아일보』의 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동아일보』의 선양(瀋陽)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10월 15일부터 12월 7일 사이에 중국의 전란(戰亂)에 따른 재만(在滿) 동포의 피해 실태 등에 관한 ‘전지행(戰地行)’이라는 종군기(從軍記)를 총 20회에 걸쳐 1면에 연재하였다. 1925년 5월 각 신문사의 사회부 기자 20여 명이 조직한 철필구락부(鐵筆俱樂部) 회원들을 중심으로 급료인상투쟁을 벌일 때 유독 동아일보사만 전혀 협력하지 않자, 임원근(林:根) 등 사회부 기자 8명이 전원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러자 박헌영(朴憲永)·허정숙(許正淑) 등과 함께 동정 사표를 제출하고 퇴사하였다. 이 즈음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화요회(火曜會)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17일 김재봉(金在鳳)·김찬(金燦)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창당을 주도하고, 창당대회에서 김재봉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당의 직제(職制)와 당칙(黨則) 제정을 맡게 되었다. 다음날인 4월 18일에는 제1회 중앙집행위원회를 열고 비서부(祕書部)·인사부(人事部)·정경부(政經部)·조사부·조직부·노농부(勞農部)·선전부 등 7개를 설치하여 중앙집행위원 7명에게 분담시켰다. 이때 선전부에 배속되어 사무를 담당하였다. 이후 몇 차례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한 결과, 조선공산당이 코민테른으로부터 정식으로 승인받고 가입하여 활동하기 위해 먼저 조봉암(曺奉岩)을 모스크바로 파견한 결과 같은 해 9월 승인을 받았다. 한편 같은 해 6월에는 직접 상하이로 가서 몇 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여운형 등을 만나 조선공산당의 결성 과정 등을 보고하였고,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이동휘·남만춘(南萬春) 등과 만나 역시 조선공산당의 조직 경과를 보고하고 협조를 구하였다. 1926년 3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 제6차 확대총회에 조선공산당 대표로 참석하여, 조선공산당에 대한 정식 승인 결정을 이끌어냈다. 모스크바에서 국내로 돌아오려 하였으나 1926년 일제의 조선공산당 탄압으로 인해 체포령이 내려져 상하이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조선공산당 상하이지부를 설립하고 해외부 위원과 당 기관지인 『불꽃(火花)』의 편집인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9월 『불꽃』 제7호에 ‘조선공산당 선언에 대하여’, ‘조선 혁명운동과 국제적 후원’ 등의 논설을 게재하였다. 1927년 1월 조선공산당을 대표하여 고려공산청년회 만주단체협의회에 참가하여, 이른바 ‘만주공청그룹’의 조선공산당 입당 결의를 이끌어냈다. 같은 해 3월 다시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파견 대표자로 선정되어 모스크바에 다녀왔다. 1928년 2월 3일 상하이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일단 부산으로 압송된 후, 부산경찰서(釜山警察署)의 호송 아래 서울로 이송되어 2월 7일 종로경찰서(鐘路警察署)에 유치되었다. 당시 주소지는 중국 상하이 프랑스조계 개평로(開平路) 149호로 되어 있었다. 1928년 6월 1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4년(미결구류일수 중 4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32년 11월 풀려난 후 사촌 동생 조동순(趙東淳)의 매제인 충남 논산의 자산가 윤희중(尹希重) 등의 도움으로 『중앙일보(中央日報)』를 인수하였다. 그리고 1933년 2월 여운형을 중앙일보사 사장으로 추대하였다. 여운형은 곧바로 신문의 제호를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로 바꾸고 혁신을 단행하였는데, 이때 편집 고문 겸 논설위원 주필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국내의 청년들을 중국으로 보내 독립운동가로 양성시키고자 한 일이 발각되어, 1933년 11월 정태희·홍증식(洪璔植) 등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후 국제공산당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이유로 재판에 넘겨졌고, 1934년 4월 16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다. 1936년 2월 26일 풀려났고, 4월 20일 여운형의 주례로 의열단(義烈團) 출신 박광(朴洸)의 차녀 박소동득(朴小東得)과 결혼하였다. 그해 조선중앙일보사에 복직하였지만, 9월부터 『조선중앙일보』가 이른바 ‘일장기 말소 사건’을 이유로 휴간됨에 따라 그만두었다. 일제의 예비검속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38년 이후에는 경북 봉화군(奉化郡) 명호면(明湖面) 도천리(道川里)에 위치한 대륙광업사(大陸鑛業社) 김기상(金基祥) 소유의 사금광(砂金鑛)으로 피신해 은둔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패망과 조선의 독립을 예견하였고, 1943년 경부터는 비밀리에 동지들을 결집하여 이른바 화요파 그룹(일명 조동호 그룹)을 결성하였다. 정재달(鄭在達)·최원택(崔元澤)·홍남표(洪南杓)·이승엽(李承燁) 등 과거 화요회 동지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독립 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표로 각지의 소규모 공산주의자 그룹들과의 연계를 모색하였다. 1943년 8월에는 여운형이 건국동맹의 모체가 되는 조선민족해방연맹(朝鮮民族解放聯盟)을 결성할 때 참여하였다. 1944년 8월 10일에는 서울 경운동(慶雲洞)에 있는 현우현(玄又玄)의 삼광한의원(三光韓醫院)에서 여운형·황운(黃雲)·이석구(李錫玖)·김진우(金振宇)·이수목(李秀穆) 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결성하였다. 건국동맹은 일제가 패망하는 결정적 시기에 국외의 무장투쟁 세력이 국내로 진격해 오면 민중들이 이에 호응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켜 일제의 권력을 몰아낸다는 독립방략에 입각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당시 국내와 일본에 다수 존재했던 소규모 비밀결사들을 아우르며 국외 독립운동세력과의 연계를 국내에서 유일하게 시도하였다. 1945년 8월 4일에는 이른바 ‘부민관(府民館) 투탄의거(投彈義擧)’로 인해 이걸소·이석구 등 건국동맹원들과 함께 관철동집회소에서 붙잡혔다. 그해 광복을 맞이하고 다음날인 8월 16일 정오 무렵 경기도경찰부에서 풀려났다. 곧바로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직된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에 참여하여 8월 17일 선전부장을 맡았다. 또한 이른바 ‘장안파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위원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여러 차례 옥고를 격은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잠시 경기도 수원의 누나 집에서 요양하였다. 1945년 9월 6일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는데 국외 독립운동세력의 귀국이 늦어지던 상황에서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통해 조선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그해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내무부장 대리로 선출되었으며, 9월 17일 ‘서울실업자동맹’을 결성하여 대표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에서는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주석으로 추대된 이승만(李承晩)의 귀국을 환영하는 담화를 발표하고 환영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때 홍남표·최용달(崔容達)·이강국(李康國) 등과 함께 환영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전국인민위원회 대표자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19일 38도선 이남 정당·사회단체의 통일전선조직으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중앙위원이 되었다. 같은 달 서울 안국동(安國洞)에 유정정치학교(榴亭政治學校)를 설립하여 정치인과 공무원 양성에 힘썼다. 그해 3월 20일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임시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개최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실업자동맹(失業者同盟)을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했는데, 전국에서 회원이 95,000명에 달하였다. 같은 해 11월 사회노동당(社會勞動黨) 결성에 참여하여 감찰위원이 되었다. 1947년 4월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이 조직될 때 서울시당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5월에는 중앙위원 및 정치협의회 위원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자 그 대책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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