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夏龍
朱夏龍1884 ~ 1937. 5. 2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강계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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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 이서면(吏西面) 송학동(松鶴洞)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84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당시 평양신학교 학생으로서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독립선언서를 입수하는 일에 관여하였고, 4월 8일 강계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강계는 압록강에 연해 있는 국경지대의 고을로서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대가 둘러싸고 있어서 교통이 매우 불편하였다. 하지만 강계는 평안북도 동북부의 중심지로서 개항 이후 신문물 도입에 적극적이었고 기독교 세력은 선천(宣川) 다음이라고 할 정도로 왕성하였다. 기독교 세력은 학교 설립에도 적극적이어서 명신학교·광신여학교·영실중학교 등을 건립하였다. 천도교 역시 일찍부터 이 지역에 뿌리내려 기독교에 맞먹을 만큼 교세를 이루었고 일신학교 설립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강계군의 독립만세운동은 이들 학교의 교원과 학생들, 기독교 및 천도교 세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3월 15일 밤에 강계읍내 각소에 ‘한국독립만세’라고 적힌 지편(紙片)이 살포되었다. 이어 영실중학교 학생들이 만세시위에 나서려고 하자 교사 김경하(金京河)가 교회 측과 시민들이 만세시위를 협의 중에 있다며 제지하였고, 대신 학생들은 태극기 2천여 장을 제작해서 때를 기다렸다. 김경하와 동료 교사인 정준(鄭儁), 교회 장로이자 명신학교 학감(學監) 한봉민(韓奉珉)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논의되었다. 김경하 등은 천도교 인사와 일반 유지들까지 접촉하면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3월 24일 최초로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이튿날인 3월 25일 다시 회합해서 구체적인 준비에 착수하였다. 회의 참석자들은 만세시위를 결의하면서 연판장에 서명 날인을 하여 시위를 끝까지 책임지기로 하였다. 기독교 측 인사로 회의에 참여하여 연판장에 서명 날인하였다. 당시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나 만세운동으로 강제휴교를 당하자 고향에 와 있었다. 만세시위의 성사를 위해서는 서울의 독립선언서 입수가 관건이었지만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독립선언서 준비를 맡았던 기독교 측에서 각 방면으로 탐문하였는데 천도교 신도인 송기숙(宋紀叔)이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교섭하였지만 후환을 두려워하며 내놓지 않았다. 송기숙에게 독립선언서를 받을 때 활약하였다. 즉 만약 일제 당국으로부터 독립선언서의 출처를 추궁당할 경우 당시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므로 본인이 평양에서 가져온 것으로 둘러대기로 한 것이었다. 독립선언서는 미국인 선교사 함가륜(咸嘉倫, C. Hoffman) 목사의 집에서 김창욱(金昌郁)이 원지글씨를 쓰고 역시 미국인 선교회에서 경영하는 계례지병원에서 2천 장을 등사하면서 만세시위의 준비를 마쳤다. 4월 8일 11시 강계읍내 남장대(南將臺) 예배당에서 종소리가 울리자 미리 약속한 대로 학생들이 일제히 뛰어나와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돌리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그날은 장날이어서 장 보러 온 사람들까지 합세하여 수천여의 군중으로 불어났다. 평화롭게 행진하던 시위대가 북문 쪽에 다다랐을 즈음, 갑자기 북문 성루 위에서 매복하였던 수비대가 갑자기 군중을 향하여 발포하여 정준 등 4인이 그 자리에서 사망하였고, 부상자도 다수 나왔다. 이후 일제 군경에 동지들과 함께 붙잡혀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재판에 회부되어 1심 및 평양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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