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朱周鳳

朱周鳳

1898. 9. 27 ~ 1935. 4.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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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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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성(安城)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기도 안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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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성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8년 9월 27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주종기(朱宗基)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초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1일 시작된 만세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안성군 원곡면에서도 만세시위를 추진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원곡면 칠곡리(七谷里)에 거주하는 이유석(李裕奭)과 홍창섭(洪昌燮), 내가천리(內加川里)에 거주하는 이덕순(李德順)·최은식(崔殷植), 외가천리(外加川里)에 거주하는 이근수(李根洙)와 이희룡(李熙龍) 등은 원곡면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추진하기 위해서 마을 주민들을 독려하였다. 이유석 등의 만세시위 권유에 적극 찬동해서 4월 1일 원곡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원곡면사무소에서 시작한 만세시위에는 칠곡리·내가천리 등에 거주하는 마을 주민들이 합류함으로써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원곡면 시위대는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휘날리면서 횃불을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원곡면 시위대의 일원으로 성은고개를 넘어서 양성면으로 행진하였다. 당시 양성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전개되고 있었다. 양성면 시위대는 양성면 경찰주재소에 집결해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양성면 시위대는 야간 시위를 마치고 자진해서 해산을 준비할 무렵인 밤 9시 50분경에 원곡면 시위대와 조우하면서 시위대는 2,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원곡면 시위대와 양성면 시위대는 양성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독립을 외치면서 돌을 던지면서 일제 군경에 대항하였다. 양성주재소로 들어가, 책상, 의자, 서류를 파괴하였다. 시위대의 일원으로 양성면의 우편소로 진입하였다. 이완호·김영서 등과 함께 우편소의 의자를 불 속에 던졌다. 다른 시위대는 우편소의 각종 서류 등을 불태우는 등의 손상을 입혔다. 일부 시위대는 우편소의 전화기를 부수고, 인근의 전신주 3개를 쓰러뜨림으로써 외부와의 통신 연결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그 이외에 시위대 일부는 안성면과 양성면을 연결하는 도로의 다리를 파괴함으로써 일제 군경의 추가 병력 파견에 따른 강경 진압을 차단하고자 하였다. 4월 2일 원곡면과 양성면의 시위대는 원곡면으로 향하였다. 새벽 4시 무렵 원곡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으며, 일부 시위대는 면사무소로 진입해서 집기와 서류를 파괴하고 숙직실을 불태우고 자진 해산하였다. 일제 경찰에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 등으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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