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尙玉
朱尙玉1883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삭주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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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평안북도 삭주군(朔州郡) 삭주면 서부동(西部洞)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37세이므로 1883년생으로 추정된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삭주군 삭주면의 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나, 자료 부족으로 참여한 만세시위를 특정하기 어렵다. 삭주군의 만세시위는 의주군(義州郡)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의주에서는 양실학교의 설립자 유여대(劉如大) 목사가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는데, 유여대는 1919년 2월 독립선언 민족대표를 권유받고 승낙하면서 서울에 가지 않고 의주와 인근 지역의 시위를 직접 지도하려고 하였다. 유여대는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과 협의한 뒤 의주군 월화면(月華面)교회 목사 송문정(宋文正)을 삭주에 밀파하였다. 천도교 측에서도 의주교구에서 독립선언서를 입수하자 일부는 3월 1일의 의주 만세시위에서 사용하고 나머지는 곧바로 강변칠읍(江邊七邑)에 보내면서 시위를 촉구하였다. 이렇게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천도교인 장대길(張大吉)이 등사하여 교인들과 함께 다시 삭주의 각 면에 보내서 3월 5일 오후 2시 각지에서 일제히 만세시위를 전개하게 하였다. 삭주읍내에서는 3월 5일 2시경 천도교와 기독교가 제휴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곧 일반인들도 가세해서 3,000여 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곧 출동하여 제지하려고 하였지만, 시위대는 이를 뚫고 헌병분견소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일제 헌병의 탄압으로 사망자가 발생하고 20명이 체포되었다. 한편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3월 3일 천도교도 3인이 독립선언서 360장을 삭주교구에 가져가는 길에 일제 헌병에 발각되어 압수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탈환하려는 시도 속에서 3월 9일 시위운동을 개시하려고 했지만, 일본군이 곧바로 해산시켜버렸다. 삭주 군민들이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시기는 3월 31일부터 1주일간이었다. 3월 31일 오전 11시경 600여 명의 시위대가 헌병분견소로 쇄도하여 창문을 파괴하는 등 실력행사를 하였다. 시위대는 곧 3,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이들은 밤에 되어서도 해산하지 않았다. 헌병들은 분견소 안에서 총격을 가하며 맞대응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4월 1일 오전에 전날과 동일하게 수천 명이 헌병분견소를 포위하여 유리창을 파괴하였는데, 이날 역시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4월 6일에는 대관리(大館里)에서 8,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다시 전개하였다. 특히 이들 중 200여 명은 스스로를 결사대라 칭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시위대는 일본군의 발포로 해산하였는데,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4월 9일 천도교도 50여 명이 시위를 재개하려고 하였으나 일본군이 해산시켰다. 이후 검거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24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8월 30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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