朱大彦
朱大彦1869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강동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3) 평안남도 강동군(江東郡) 만달면(晩達面) 화천리(貨泉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51세이므로, 1869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화천리 구장으로 일하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3월 31일 강동군 읍내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강동군에서는 3월 7일 원탄면(元灘面)에서 기독교도 500여 명이, 고천면(高泉面)에서 기독교도 50여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시작함으로써 본격적인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남 강동군 원탄면 신용리(新龍里)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이동찬(李東贊)이 3월 29일경 강동군 만달면으로 와 3월 30일과 31일에 읍내에서 있을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였다. 이때 같은 마을에 사는 원용일(元容一) 등과 함께 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3월 30일과 31일 강동군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었다. 3월 30일 강동군 읍내에서 천도교인 400여 명과 함께 태극기와 천도교의 상징인 궁을기(弓乙旗)를 흔들고 만세를 외치며 읍내를 행진하였다. 이어 강동군청, 면사무소, 헌병대 앞에서 만세 삼창을 부른 후, 출동한 일제 헌병에 의해 해산당하였다. 다음날인 3월 31일에는 전날의 천도교인을 비롯하여 인근의 농민들이 모두 모였는데, 그 규모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오전 10시 시위대는 세 방향으로 나누어 읍내로 향하였으며, 전날과 같이 강제 해산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낫과 호미, 몽둥이 등을 들고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시가 중앙 홍문 앞거리에서 대열을 합친 시위대는 그곳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즉시 헌병대 및 면사무소로 나아갔다. 읍내에서 경계 중이던 일제 헌병과 보병들이 출동하여 발포한다고 위협하면서 군중을 강제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300여 명이 붙잡혔는데, 이때 일제 헌병에게 붙잡혔다. 이후 헌병대에서 심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헌병에게 조사를 받던 1919년 4월 11일 선동을 사유로 화천리 구장에서 면직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조선 민족으로 조선 독립 만세를 부른 것이고, 자유를 바란 것이기 때문에 보안법을 적용한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6월 19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8월 28일 고등법원에서 최종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