周基元
周基元1884. 1. 22 ~ 1953. 1. 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평양부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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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4년 1월 22일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수옥리(水玉里)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신자로서 1919년 무렵에는 감리교 교단 소속인 평양 채관리(釵貫里) 교회 목사로 봉직하고 있었다. 그해 3월 1일 평양에서 거행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1919년 1월 28일 『매일신보』에 민족자결주의에 관한 기사가 올라온 이래, 계속해서 독립선언을 열망하던 중, 서울에서 민족대표가 모여 만세운동을 벌일 것이라는 소식이 평양에도 전해졌다. 평양에서는 장로교의 이승훈(李昇薰)이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는 등 만세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이 소식이 감리교에도 전해져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1일 오후 1시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기로 한 시간에 맞추어 감리교 남산현(南山峴) 교회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곧이어 행사의 명분이었던 고종 추도식이 실시되었고, 이어 이향리(履鄕里) 교회 목사 김찬흥(金燦興)의 사회로 독립선언식이 시작되었다. 이때 맨 처음으로 단상에 올라 민족대표 33인의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 수행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내려간 후에는 남산현 교회 목사인 박석훈(朴錫薰)이 연단을 이어받아 연설하였다. 이후 시위대와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가 행진을 시작하였다. 남산현 교회를 나선 시위대는 곧 평양 시내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남문 거리에 있는 평양경찰서 앞에서 장대현(章臺峴) 교회에서 출발한 장로교 시위대,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출발한 천도교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시위대는 곧 일본인 거리로 향하여 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으며, 이후에는 도청·재판소는 물론 평양부청(平壤府廳)·평양형무소 등 일제의 권력기관 앞을 순회하며 만세를 외치고 독립의지를 알렸다. 이러한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일제 헌병들은 폭력을 이용해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다음날인 3월 2일부터 일제 군경은 본격적으로 시위 주모자들을 붙잡기 시작하였다. 이때 붙잡힌 것으로 보인다. 재판 과정에서 “세계 평화의 대운(大運)에 따라 독립과 자유를 선언한 것이고, 비폭력으로 운동하여 치안을 방해한 사실이 없다”며 죄가 없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다시 상고하였지만, 그해 9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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