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漢輝
趙漢輝1893. 12. 15 ~ 1935. 10. 21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함안청년회
- · 신간회 함안지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함안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3년 12월 15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함안면 봉성동(鳳城洞)에서 태어났다. 함안군 상리면(上里面) 찬명학교를 다녔고 성적이 우수하였다. 1919년 당시에는 한문교사로 일하고 있었으며, 3월 19일 함안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고종의 장례식에 한종순(韓鍾淳)·조병흠(趙丙欽)·조문국(趙文國)·안재휘(安在輝)·박건병(朴建秉)·이찬영(李讚榮)·강기수(姜琪秀)·한관렬(韓灌烈) 등과 상경하여 참석하였다. 3월 1일 서울의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3월 5일 귀향하여 시위 소식을 알렸다. 내려오면서 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지참하여 지역 민족주의 인사들에게 전달하였고, 한종순 등과 함께 함안 지역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3월 19일 함안읍 장날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만세시위를 위한 준비 작업의 역할을 분담하였는데, 이희석(李喜錫)·이찬영과 함께 독립선언서 등사를 맡았다.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의 문장이 어렵고 길었기 때문에, 등사의 편의도 도모하고 군중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내용을 줄이고 개작하여 전단 형태로 만들어 복사하였다. 3월 19일 정오, 함안 읍내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비봉산(飛鳳山) 고천제(告天祭)에 참석하였다. 이후 하산하여 읍내 중심지인 봉성동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태평루(太平樓)에 태극기를 걸고, 동명학교 교사 이희석(李喜錫)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수백 명의 시위 군중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행진하기 시작하였다. 선두에 서서 군중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었다. 만세시위가 전개되면서 참여한 군중은 3천여 명까지 불어났다. 시위 군중과 함께 함안우체국에 투석하고 유리창을 파괴하였으며, 함안경찰관 주재소에도 들어가서 기물을 파괴하였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마산의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폭력적인 진압에 나섰다. 만세시위 주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작전도 다음날인 20일까지 지속되었다. 주도자로 붙잡혀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8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후에도 항일 민족운동을 지속하였다. 함안청년회가 1925년 재결성할 때부터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0월 16일 신간회 함안지회가 창립될 때 회장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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