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學伊
趙學伊1890. 10. 27 ~ 1953. 6. 3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안동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3) 1890년 10월 27일 경상북도 청송군(靑松郡) 진보면(眞寶面) 부곡동(釜谷洞)에서 태어났다.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21일 경북 안동군(安東郡) 안동면 편항시장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편항시장 만세시위는 월곡면(月谷面) 계곡동(桂谷洞)에 사는 유연성(柳淵成)이 유동수(柳東洙)·유교희(柳敎熙)·이강욱(李康郁)·홍명성(洪明聖)·박재식(朴載植)·박진선(朴晋先 또는 박진성(朴晋成))·유곡란(柳谷蘭)과 함께 전개하였다. 주도자들은 1919년 3월 21일 편항시장에서 만세운동을 펼치기로 결의하고 각자 구역을 나누어 주민들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주도자들은 주민들에게 21일 편항시장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날 예정임을 알리고 동참을 권유하였다. 만세시위 소식이 암암리에 퍼지면서 안동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까지도 만세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거주하고 있던 청송군에서는 아직 만세시위 움직임이 보이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편항시장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거사 당일인 21일 아침 일찍 편항시장으로 향하였다. 장터에는 장꾼 외에도 만세운동 주도자들과 주민들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후 2시경 유연성이 군중들 앞에 나와 연설을 시작하였다. 유연성은 왜 만세운동을 해야 하는지 군중들에게 이야기한 후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유연성의 선창에 시위대들과 함께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운동 소식을 듣게 된 일제 경찰이 현장에 급파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유연성과 배태근(裵太根)을 주도자로 지목하여 붙잡으려 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제 경찰 우치다(內田甚助)가 저항하는 배태근의 뺨을 때렸다. 분노한 시위대는 우치다에게 달려들어 저지하였다. 군중들의 기세에 놀란 우치다는 주재소로 달아났고, 시위대도 곧 주재소로 향하였다. 이때 유연성·박진성·배태근과 함께 선두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500여 명의 시위대가 주재소에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자, 이를 본 우치다가 권총 한 발을 발사하였다. 권총 소리에 분노하여 유연성·유곡란과 함께 우치다 앞으로 가서 가슴을 열고 “죽이려거든 여기를 쏘아라”고 하며 대담하게 나섰다. 세 사람의 기세에 눌린 우치다를 비롯한 일제 경찰들이 달아나자, 유교희·김치경(金致慶) 등과 뒤쫓아 우치다를 붙잡고 시위대에게 행한 횡포를 응징하였다. 그때 시위대는 주재소 출입문과 벽, 창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책상과 의자 등을 파괴하였는데, 여기에 곧 합류하였다. 시위대는 일제 경찰에게서 빼앗은 총검과 주재소에 있던 무기들을 모두 모아 우물 안에 버렸다. 또 유교희·유동환(柳東煥) 등과 함께 경찰 숙소로 가서 침대와 책상, 의류 등을 모두 버렸다. 오후 5시경 기세를 몰아 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로 달려갔다. 1,5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면사무소까지 행진하며 만세를 불렀다. 면사무소에 도착해서는 몽둥이와 돌로 입구를 부수고 유리창과 벽, 사무소 비품 등도 완전히 파괴하였다. 면사무소까지 완전히 파괴한 후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이어갔고 다음날 새벽 3시에 자진 해산하였다. 다음날부터 일제 경찰은 만세시위 관련자를 붙잡기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붙잡혔다. 1919년 4월 17일 대구지검으로 이감되었으며, 5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소요죄, 건조물 손괴죄, 가택 침입죄, 상해죄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지만, 같은 해 8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 후 형량인 동일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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