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昌鎰
趙昌鎰1884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2)
관련 사건
- · 평양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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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2) 평안남도 평양부(平壤府) 관후리(館後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36세이므로 1884년생으로 추정된다. 기독교를 신앙하면서 평양 이향리교회(履鄕里敎會)에 적(籍)을 두고 활동하였다. 1919년 3월 1일 거행된 평양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평양에서의 만세시위는 기독교계의 장로교(長老敎) 및 감리교(監理敎) 계열과 천도교(天道敎)가 사전에 민족대표 33인과 교감하면서 준비되었다. 감리교에서는 이향리교회 목사(牧師) 김찬흥(金燦興),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 목사 박석훈(朴錫薰), 채관리교회(釵貫里敎會) 목사 주기원(周基元)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준비하였다. 당시 이향리교회의 권사(勸士)로 활동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시위 준비에 상당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2월 말경부터 서울에서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진 이후, 시위 준비와 식순, 과정 등을 정하는 회의가 열리곤 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 직전이던 2월 28일에는 자신의 집을 회의 장소로 제공하여 남산현교회 유사(有司) 박현숙(朴賢淑) 등과 함께 독립선언식 식순을 결정하였다. 3월 1일 오후 1시 서울의 독립선언식과 같은 시간에 남산현교회에는 많은 신자들이 모여들었다. 이향리교회 사람들과 함께 남산현교회로 이동해 참석하였다. 김찬흥 목사의 사회로 독립선언식이 시작되었고 이어 주기원 목사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으며, 박석훈 목사가 연단을 이어 받아 연설하였다. 사람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서 행진을 시작하였다. 행렬은 영창여관(永昌旅館)을 지나 평양 남대문 경찰서로 향하였다. 남대문 경찰서 앞에서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독립선언식을 마치고 행진을 해 온 장로교계열의 시위대와 합세하였으며, 일본인 신시가지를 향해 나아가며 대한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하였다. 시위대는 두 갈래로 갈라져서 도청(道廳)·재판소(裁判所)·평양부청(平壤府廳)·형무소(刑務所)·일본인 중학교(中學校) 등 일제 지배기구 앞을 지나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등, 평양 시내 곳곳을 누비며 행진하였다. 다음날인 3월 2일부터 일제 군경은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잡기 시작하였는데, 이때 일제 헌병에 붙잡힌 것으로 보인다. 평양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지만, 1919년 7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자신의 생존을 타인에게 맡기지 않으려고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죄가 될 수 없다며 재차 상고하였으나, 그해 9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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