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昌瑞
趙昌瑞1880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조선독립단 이원지단
포상 정보
- · 애족장(2013)
관련 사건
- · 이원군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13) 함경남도 이원군(利原郡) 동면(東面) 청동리(淸洞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9년 당시 40세이므로 1880년생으로 추정된다. 잡화상으로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0일 이원군 서면(西面) 장터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3월 17일 이원군 동면 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5일 함경남도 이원군 일대에 조선독립선언서와 만세시위 소식이 전해졌다. 3월 7일 이원군 천도교 교구장 김병준(金秉濬)이 개최한 천도교 회합에 참여하였다. 이날 이도재(李道在)·박승룡(朴承龍)을 비롯해서 이원군내 인사 15명과 함께 조선독립선언서를 회람하였다. 이도재 등과 함께 이원군 서면 남문리(南門里)에 위치한 읍내 시장에서 장이 서는 3월 10일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심하였으며, 조선독립선언서를 토대로 이원군 만세시위에 사용할 선언서를 작성하였다. 3월 8일 이도재는 만세시위에 군중들에게 나누어줄 선언서를 이원군 천도교구실에서 인쇄하였다. 선언서에는 ‘우리들 조선 민족은 세계의 대세에 따라 민족자결 원칙에 의해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2천만 동포에게 경고한다’라는 내용과 아울러 만세시위를 주도하는 15인의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나아가 15인을 중심으로 조직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 이원지단에 참여하였다. 3월 10일 오전 11시 30분경 이원군 서면 남문리(南門里)에 위치한 읍내 시장에서 시작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도재와 박승룡 등은 미리 준비한 선언서를 장터에 모여 있는 군중들에게 배포하였다. ‘조선민족독립단(국)’ 독립기를 들고 시위대의 선두에 선 박승룡은 깃발을 흔들면서 시위대를 인솔하였다. 김창렬은 ‘우리들은 오늘 즉 독립의 오늘에야 비로소 인간이라는 직분과 동양인이라는 의무를 다할 기회를 얻었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함으로써, 장터에 모인 사람들의 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는 8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와 함께 서면의 남문리(南門里)·서문리(西門里)의 이원군청·헌병분견소·공립보통학교·이원시장 일대를 행진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17일 이원군 동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만세시위는 전날 함경남도 이원군 동면 용암리 용암시장에서 모인 소수의 인사들이 추진하였다. 3월 17일 오후 2시 무렵 동면 면사무소에서 김희순(金希舜) 등과 함께 마을 주민 400여 명을 인솔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는 지난번에 납부한 세금을 반환하라고 외치면서 면사무소를 압박하였다. 이러한 활동 중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30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고하였으나, 그해 8월 1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만세시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인도에 근거하는 의사행위로 죄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25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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