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秦行
趙秦行1885. 9. 2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진남면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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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1885년 9월 22일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진남면(津南面) 동장리(東場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장단군 진남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이 확산 중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이창영(李昶永) 등과 함께 장단군 진남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동지들과 협의하여 만세시위 거사일을 3월 26일 밤으로 결정하고, 많은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장소로 동장리에 소재한 사립 성화학교(聖化學校) 뒤편의 공터를 선택하였다. 3월 26일 밤 100여 명의 주민들이 성화학교의 뒤편 공터로 모였다. 이창영 등과 함께 주민들을 규합하여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한동안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의 사기를 올린 뒤, 시위대를 이끌고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만세시위대가 면사무소에 도착했을 때 이미 면장 김기완(金基完) 이하 면사무소 직원들은 모두 도주하여 한사람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창영과 강규수(姜奎秀)는 면사무소가 비어있는 것에 분노하여 곤봉을 휘두르며 ‘면장을 찾아 죽여라. 면사무소를 부숴라’라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렇게 외친 직후 이창영이 먼저 솔선하여 가지고 있던 곤봉을 휘둘러 면사무소의 장지문에 부착된 유리창을 파괴하였고, 강규수·한기동(韓基東)·정순만(鄭順萬) 등은 면사무소를 향하여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이에 격앙된 시위대의 다른 주민들도 면사무소의 뜰 안으로 난입하여 손에 잡히는 대로 면사무소 건물을 향해 돌덩이와 흙덩이 등을 던져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 이후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6월 2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7월 2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자신의 행위는 ‘조선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따른 의사 발동으로 범죄가 아님에도 제1심 및 제2심의 재판에서 선고된 유죄판결은 부당하며 복종할 수 없는 위법한 내용’이라는 취지로 상고하였으나, 같은해 9월 27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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