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 독립운동가 목록으로

趙鍾護

趙鍾護

1889. 10. 10 ~ 1932. 8. 10

김판서 캐릭터 이미지

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趙鍾護

김판서는 역사 탐구를 돕는 가상의 AI 문화해설사예요.

추천 질문을 누르거나, 궁금한 내용을 직접 물어보세요.

0/200자
황해 연백(延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황해도 연백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연안읍 만세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89년 10월 10일 황해도 연백군(延白郡) 해성면(海城面) 초양리(草陽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면서 면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연백군 연안읍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2월 28일 연백군 연안읍 개신교 목사 손창현(孫昌鉉)은 서울의 인편을 통해서 100여 장의 조선독립선언서를 받았다. 3월 1일 조우삼(趙友三)은 손창현으로부터 조선독립선언서를 교인들에게 배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조우삼은 교회 전도사 홍성환(洪性煥)·김창헌(金昌憲)을 비롯해서 교인들에게 조선독립선언서를 전달해 주었다. 손창현은 자신의 부인을 통해서 장정근(張貞根)에게 조선독립선언서 10매를 전달하였으며, 장정근은 개신교 교인들에게 조선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이후 연백군 주민 편강렬(片康烈)·김각배(金珏培)·김경태(金竟泰)·신현기(申鉉琦)·송창섭(宋昌燮) 등이 연백군 내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이들은 일제 군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서 해성면(海城面) 유지인 조종호(趙鍾濩)의 집 뒷산에 모여서 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면장, 면서기 그리고 구장들도 계획에 동참할 뜻을 밝혔다. 만세시위 계획은 봉북면(鳳北面)·호동면(湖東面)·호남면(湖南面)·해성면(海城面)의 면 단위로 시위대를 조직하여 연안읍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3월 15일 봉북면 시위대가 연안읍 동문을 통과하려고 하였다.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연안읍 내 진입을 시도하였지만, 일제 헌병의 무력 진압으로 저지당하였다. 그리고 진압 및 해산 과정에서 시위대 일부가 붙잡혔다. 3월 16일 호동면 시위대가 일제 헌병의 저지선을 뚫고 연안읍에 진입하자, 사람들이 적극 호응하여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3월 18일 호남면과 해성면 주민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연안읍 서문으로 진출하였다. 3월 18일 당일 해성면 면사무소로 출근하였다. 그런데 면 주민 300여 명이 면사무소에 진입하였다. 시위대 일원 중에서 정배근(鄭培根)이 ‘파리에서 열린 세계평화회의 결과로 약소국들이 모두 독립하고 있으며, 조선도 독립을 달성한다’라고 말하면서 면장 이하 직원과 함께 시위에 참여할 것을 설득하였다. 시위대 일부가 헌병부대나 군청으로 몰려가자고 주장하자, ‘이는 정당하지 못한 행위’라고 하면서 말렸다. 그리고 시위대와 함께 면사무소 내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으며, 손수 제작한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에 동참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군경이 총칼로 시위대의 행진을 저지하자, 시위대는 돌멩이와 곤봉으로 맞섰다. 일제의 무력 진압 과정에서 일제 헌병에 붙잡혔다. 해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1919년 7월 17일 고등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국어사전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