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愚植
趙愚植1874. 4. 6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1919년 연천군 백학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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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1874년 4월 6일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미산면(嵋山面) 석장리(石墻里)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왕징면(旺澄面) 동중리(東中里)의 정현수(鄭賢秀) 등과 함께 연천군 최초의 만세운동이었던 백학면(白鶴面)과 미산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1일 두일리장터 한복판에서 홀로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고, 주변 주민들에게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권유하며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만세운동을 시작하자마자, 그 취지에 공감한 정현수·구금용(具今龍)·이낙주(李洛周)·홍순겸(洪淳謙)·김복동(金復東)·한상혁(韓相赫)·김문유(金文裕) 등이 호응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만세시위가 전개되는 모습을 보고 공감한 주민들이 시위에 동참하자 규모가 1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장터를 순시하던 일제 헌병 1명과 헌병보조원 1명이 만세시위를 중단하고 즉각 해산할 것을 명령했으나, 시위대는 만세시위를 계속적으로 진행하였다. 시위대의 규모가 확대되어가자, 정현수·구금용·이낙주·홍순겸·김복동·한상혁·김문유 등과 만세시위의 지휘부를 구성하였다. 이들과 함께 협의하여 백학면의 면장 윤규영(尹圭榮)을 만세시위에 합류시키기로 결정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면사무소로 행진하였다. 정현수가 나서서 면사무소에서 면장 윤규영을 끌고 와서 만세시위에 동참하여 ‘조선독립만세’를 함께 외칠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만세시위대의 기세는 고조되었고, 구금용은 많은 주민의 만세시위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면사무소의 소방용 경종을 울렸고, 박영학(朴永鶴)과 정현수 등은 장터에서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시위대의 규모는 2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면사무소 앞에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 주민들과 함께 면사무소로 들어가 면사무소 직원들도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면사무소 안에 있던 면서기 정기만(鄭基萬)이 시위대의 요구를 거부하자,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정현수가 만세시위대의 선두에서 면사무소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자 만세시위대가 적극적으로 호응하였고, 이때 함께 면사무소의 시설과 집기를 파괴하였다. 이날 밤 10시경 정현수 등과 200여 명의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일제의 헌병주재소가 위치한 미산면 마전리(麻田里)로 이동하였다. 만세시위의 목표는 헌병주재소였으나, 정현수·구금용 등과 논의하여 면사무소에서의 격렬한 시위 후의 휴식과 함께 만세시위대를 정비할 필요가 있어서 일단 만전리의 문묘(文廟)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급하게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하지만 헌병주재소로 행진하지는 않고, 제작한 태극기를 시위대의 선두에 앞세우고 200여 명의 만세시위대를 지휘하여 문묘 앞에서 이튿날 새벽까지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후 석장리로 가는 도중 일제 헌병들의 무력 탄압에 의해 시위대는 해산되었고, 이때 붙잡혔다. 1919년 5월 22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를 이유로 징역 5년을 받았다.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그해 7월 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받았다. 이에 “자신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도에 근거하여 의사 발동한 것으로 범죄가 아니므로 제1심 및 제2심의 유죄 판결은 부당하며 복종할 수 없다”는 취지로 상고하였다. 같은 해 9월 18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징역 3년을 받았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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