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鏞浩
趙鏞浩1874. 12. 25 ~ 1919. 3.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1919년 함안군 군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74년 12월 25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사촌리(舍村里)에서 태어났다. 자는 경장(敬章)이다. 1919년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함안군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5일부터 시작되었다.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한 지역 인사들이 독립선언서를 몰래 지참하고 내려와 서울의 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하였다. 그날 밤 군북지역 인사들이 사촌리에 위치한 조용대(趙鏞大)의 사랑채에 모여서 군북면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구체적인 계획은 3월 10일 서산서당에서 논의되었다. 거사일은 3월 20일 군북면 장날로, 정오에 장터에서 시작하기로 하였다. 시위에 필요한 수천 장의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등 역할을 분담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원본이 장문이라 등사가 힘들어서 내용을 축약하여 전단 형태로 5,000여 장을 제작하였다. 전단 등사는 신창학교 등사기를 이용하였다. 가장 중요한 군중 동원은 주도자들의 거주지를 기준으로, 지연과 혈연을 통한 연락망 구축을 기반으로 준비되었다. 이때 지역 연락과 군중 동원에 참여하였다. 거사일까지 준비 점검 및 일제 경찰, 밀정의 동향 파악 등을 위해 수시로 모였는데, 서산서당과 원효암(元曉庵) 등이 장소로 사용되었다. 서산서당에 모일 때는 한문 강학을 구실로 하였고, 원효암에 모일 때는 나무꾼으로 가장하여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하였다. 제작된 독립선언 전단과 태극기는 나뭇짐과 갓집 속에 숨겨 군북 장터로 옮겼다. 정작 거사일인 3월 20일이 되자 만세시위는 원래 계획을 변경하여 오전 9시 신창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식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전날인 3월 19일 함안 읍내 시위로 인해 일제 군경의 감시가 심해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전날 함안 읍내 시위를 진압했던 일본군 중포병대대에 의해 해산되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이동하여 오후 1시 군북 장터 옆의 냇가에서 2차 시위를 시작하였다. 장터에 모인 사람들과 인근 거주민들이 합세하여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 다시 일본군 중포병대대 16명을 필두로 경찰들이 합세하여 폭력적 진압이 진행되었다. 시위대는 도리어 기세를 높여 일제 군경과 몸싸움을 벌이며 투석전까지 전개하여 군북면사무소와 주재소의 유리창 등을 파손시켰다. 일제 군경은 폭력 진압에도 시위대의 저항이 오히려 격렬해지고, 군경 중에 부상자까지 발생하게 되자 위협을 느끼고 일제히 실탄으로 조준 사격을 시작하였다. 당시 선두에서 격렬하게 시위를 전개하던 인사들과 함께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국어사전
원문에서 어려운 낱말을 선택하거나 직접 검색해 보세요.
낱말을 검색하면 뜻풀이가 여기에 표시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