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鏞聲
趙鏞聲1897. 9. 13 ~ 1961. 8. 27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3)
관련 사건
- · 1919년 함안군 함안읍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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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3) 1897년 9월 13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산인면(山仁面) 운곡리(雲谷里)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정견(正見)이다. 이명은 조용성(趙鏞成)·조위대(趙渭大)이다. 재산이 약 10,000원 정도 되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학 교육을 받았으며, 당시 한문 교사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9일 함안군 함안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9일 함안 읍내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난 함안 읍내 만세시위는 3월 5일 고종의 장례식에 참가하고 돌아온 조한휘(趙漢輝)·한종순(韓鍾淳)·조병흠(趙丙欽) 등 지역 인사들이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국상에 참가한 인사들은 안지호(安知鎬) 등 지역의 항일민족주의 인사들과 연락하여 3월 19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짧은 전단 형태로 바꾸어 등사하였다. 군중에 나눠줄 태극기 제작, 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 등 각자 업무를 분담하고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이처럼 만세시위가 열린다는 소식을 받고 3월 19일 아침 일찍 읍내로 갔다. 만세시위는 함안 읍내 중심부인 봉성동(鳳城洞)에서 수백 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서 낭독으로 시작되었다. 시위대는 주재소, 군청, 법원출장소 등 일제 식민지배의 상징적 건물을 향해 나아갔다. 이때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시위가 전개되면서 장터 주위의 군중이 합세하여 시위대는 삽시간에 3,000여 명 규모로 늘어났다. 일제 경찰의 폭력적 진압이 시작되자 시위대도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투석전을 전개하고 주재소, 군청 등의 건물 내부로 들어가 건물 유리창, 집기, 문서를 파손하고 관계자에게 폭행을 가하였다. 수천 명이 참여한 만세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결국 일본군 수비대가 투입되어 총검으로 진압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체포하였다. 시위 현장에서 붙잡혀 같은 해 5월 15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으나, 그해 8월 1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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