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鏞燮
趙鏞燮1890. 2. 1 ~ 1919. 3. 20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1919년 함안군 군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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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장(1991) 1890년 2월 1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동촌리(東村里)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한필(漢弼)이다. 호(號)는 이강(夷岡)이다. 군북면 만세운동의 진원지인 서산서당(西山書堂)에서 한학을 배웠고, 지역 유림으로서 민족의식을 고양하였다. 고종 국상 때에는 헌 파립과 상복을 입고 애통해 하였다고 한다. 1919년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함안지역 만세운동은 고종의 장례식에 참여한 지역 인사들이 돌아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독립선언서를 몰래 지참하고 내려와, 서울의 만세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하였다. 군북면 만세시위 계획은 1919년 3월 10일 서산서당에서 구체화되었다. 3월 20일 군북 장날에 맞춰서 거사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였고, 준비를 위한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지역별로 거사일을 알리고 군중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책임자가 결정되었고, 시위 물품으로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등의 역할도 분담하였다. 당시 태극기 수천 장과 독립선언서를 전단 형태로 축소하여 5,000여 장을 제작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신창학교 등사기를 이용하여 제작하였다. 준비를 위한 모임과 시위 물품 제작은 서산서당과 원효암(元曉庵) 의상대(儀湘臺) 등에서 이루어졌다. 제작된 독립선언 전단과 태극기는 나뭇짐과 갓집 속에 숨겨져 군북 장터로 옮겨졌다. 군북면 만세시위는 3월 20일 오전 9시 신창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조상규(趙相奎) 등 주도자들과 함께 참석하여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러나 일제 군경의 출동으로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시위 주도자들과 함께 군북면 장터 인근 냇가에서 오후 1시부터 다시 만세시위를 재개하였다. 조상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또 다른 주도자인 조용규(趙龍奎)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면서, 그곳에 모였던 약 5,000명이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파견 나와 있던 일본군 중포병대대가 시위 진압에 참여하면서 총검에 의한 폭력적인 진압이 진행되었다. 시위대는 보다 적극적인 행동으로 투석전을 전개하는 한편 군북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향해 진격하고 포위하였다. 폭력적 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대의 저항이 오히려 강력해지자 위협을 느낀 일제 군경은 일제히 실탄으로 조준 사격을 가하였다. 시위 현장에서만 20명이 사망하였으며, 총 39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때 그 자리에서 총을 맞고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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