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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榮漢

趙榮漢

1894. 8. 5 ~ 1923.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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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趙榮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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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盈德)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영덕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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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1919년 영덕군 영해면
  • · 병곡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1894년 8월 5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인이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寧海面)과 병곡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영덕군의 만세운동은 북장로교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과 구세군 참위(參尉) 권태원(權泰源) 등에 의해 준비되기 시작하였다. 김세영은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가던 중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경험하고 귀향하였고, 3월 12일 평소 친하게 지내던 권태원과 만나 파리강화화의와 민족자결주의 등 세계정세와 전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만세운동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권태원에게 영덕에서도 만세시위를 일으켜야 한다고 설득한 후, 병곡면 송천동교회의 조사 정규하(丁奎河) 등을 만나 만세시위에 관하여 논의하도록 하였다. 권태원은 정규하 등과 만나 영해면 성내동시장의 장날인 3월 18일 만세시위를 거행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어서 권태원은 문중 사람들을 만나 만세시위 참여를 권유하였고, 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 등으로 하여금 인근 양반들의 동참을 이끌어내도록 하였다. 이때 정규하의 집에서 서삼진(徐三辰)·김원발(金源發) 등과 함께 만세시위에 대한 설명을 듣고, 거사에 동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참여자들과 더불어 각자 마을주민과 다른 사람들에게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기로 하였다. 3월 18일 정오경 정규하·박희락(朴羲洛)·남효직·남여명 등은 사전에 준비한 대형·중형·소형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종이를 가지고 시장으로 진입하였다. 오후 1시경 주도자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자 장터에 있던 2,000~3,000명과 함께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다. 이어서 독립에 관한 연설을 들은 시위대와 함께 영해경찰관주재소, 영해공립보통학교, 면사무소, 우편소, 영해공립심상소학교 등으로 이동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주재소 일제 경찰들이 출동해 시위대를 향해 해산을 명령하며 저지하자, 주도자들과 함께 그들을 구타하였다. 이 과정에서 주재소와 보통학교 건물은 지붕과 기둥만 남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오후 2시 경에는 정규하 등이 이끄는 시위대와 함께 병곡면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정규하가 큰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면 바로 따라 부르면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오후 4시경 병곡동(柄谷洞)에 도착해 시위대와 함께 저지하는 병곡경찰관주재소 경찰들과 맞서며 투석으로 대항하였다. 이어서 일제 경찰 등을 공격하며 주재소와 면사무소의 시설물을 파괴하는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일로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방해, 건조물손괴, 기물손괴, 공문서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홍종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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