曺成龍
曺成1898. 8. 10 ~ 1984. 9. 2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안주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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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98년 8월 10일 평안남도 안주군(安州郡) 안주면(安州面) 건인리(建仁里)에서 태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자 크게 슬퍼하였으며, 그 이후 독립사상을 남몰래 키워나갔다. 기독교인으로 1919년 3월 23일 안주군 입석면(立石面)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1일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안주에서도 3월 1일에는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안주면에서, 연이어 3월 3일에는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안주면 서문 밖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렇듯 주변 지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이에 크게 고양되어 안주군 입석면에서 거사를 준비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서울로부터 민족대표 33인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비롯한 『자유신보』, 「2,000만 동포에 대한 경고문」 등을 입수한 후 이를 등사하여 배포할 준비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거사 당일 배부할 태극기와 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를 별도로 제작하는 등 만세운동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3월 23일 오후 2시경 입석면 장날을 맞이하여 3,000여 명이 장터로 모여들었다. 이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며 만세운동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고영규(高營奎)·윤동휘(尹東彙) 등도 이때 독립선언서를 나눠 받고는 취지에 공감하여 근처에 있는 사람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였다. 입석보통학교 교사와 학생들을 비롯한 3,0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전개하였다. 시위 소식을 접한 일제 군경은 즉시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를 해산시키려고 하였다. 이에 안주수비대 보병(步兵) 6명이 출동하였고, 인근 대동군(大同郡) 부산면(斧山面)에서도 일제 헌병 등 6명이 증원되어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후 일본 헌병의 검속 때 고영규·윤동휘 등과 함께 붙잡혀 입석헌병주재소에서 심문을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재판 과정에서 조선 민족으로 자국의 독립을 이행할 목적으로 정당하게 행동하였을 뿐이라며 무죄를 주장하였으나 인정되지 않았다. 결국 이른바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며 항소하였으나, 1919년 6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같은 해 8월 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윤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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