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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邦仁

趙邦仁

1890. 1. 10 ~ 1943. 2.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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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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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안동(安東)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북도 안동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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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예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0년 1월 10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예안면(禮安面) 부포동(浮浦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1919년 3월 17일 예안면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주도하였다. 1919년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안동군에서도 3월 13일 첫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안동 장날에 있었던 이상동(李相東)의 1인 만세시위는 유림들이 만세운동을 펼치는 데에 기폭제가 되었다. 같은 마을에 사는 조수인(趙修仁)에게 만세시위 제의를 받고 계획에 동참하게 되었다. 이맹호(李孟鎬)·김진휘(金振輝)·이원영(李源永) 등도 함께 뜻을 모으기로 하였다. 주도자들은 17일 예안면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펼치기로 결의하고 비밀리에 만나 시위에 쓸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안동군 유림 외에도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은 면서기 이광호(李洸鎬)·이중원(李中元), 잠업(蠶業) 순회교사 이시교(李時敎) 등 예안면 사람들을 규합하여 대규모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 신응한(申應漢)이 주축이 된 기독교도들도 17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람들을 규합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17일 거사 당일, 태극기를 숨기고 장터로 향하였다. 장꾼과 주민들로 붐비는 장터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때를 기다렸다. 오후 3시 30분경 장터와 가까운 선성산(宣城山)에서 한 무리의 군중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 만세소리를 신호로 시위대가 장터 세 곳에서 한꺼번에 나와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이에 태극기를 펄럭이며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장터 곳곳을 누볐다. 장꾼과 주민들도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시위 열기가 점점 더 고조되자 주도자들은 이 기세를 몰아 경찰관주재소로 향하였다. 앞을 막는 일제 경찰과 수비대를 뚫고 행진하는 동안 길가의 학생과 주민들이 호응하면서 사기는 점점 더 높아졌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수비대를 동원하여 군중을 위협하였고 주도자 등 15명을 체포하였다. 주도자들이 체포되자 시위대도 잠시 해산하였다. 흩어졌던 시위대는 오후 6시경 다시 모여 주재소로 향하였다. 조수인·이맹호 등과 함께 선두에서 1,50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구속자 석방을 외치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주재소 안에서 투석전을 전개하자, 더 많은 일본군 수비대를 급파하여 시위대를 해산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수인·조사명(趙思明)·이회림(李晦林)·이맹호 등이 수비병의 칼에 찔려 부상을 입었으며, 주도자 24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면서 시위대도 해산하고 만세시위도 끝을 맺었다. 1919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도 형량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재판 결과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지만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됨에 따라 징역 1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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