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銅奎
趙銅奎1885. 6. 2 ~ 1959. 3. 29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함안군 군북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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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0) 1885년 6월 2일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군북면(郡北面) 동촌리(東村里)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명칠(明七)이고, 호(號)는 이봉(夷峯)이다. 한학 교육을 받았고, 지역에서는 문장가로 이름이 있었다. 항일의식을 가진 유림으로 경남지역의 민족주의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이 가운데 함안면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희석(李喜錫)과 일제강점기 민족자본가로 잘 알려진 백산상회(白山商會)의 안희제(安熙濟)도 있었다. 1919년 3월 5일 고종 장례식에 참여하고 돌아온 조한휘(趙漢輝)·한관열(韓灌烈) 등이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한 후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계획되었다. 이를 위해 사촌리(舍村里)에 위치한 조용대(趙鏞大)의 사랑채에서 군북 지역 인사들과 함께 회합하였다. 그리고 3월 19일 거행될 함안면 만세시위에 참석할 것과 다음날인 3월 20일 군북면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하기로 하였다. 군북면 만세시위는 3월 10일 백이산(伯夷山) 서산서당(西山書堂)에 다시 모여서 구체적인 계획 수립과 거사 준비를 위해 태극기 제작·독립선언서 등사·군중 동원을 위한 연락·거사일까지의 일제 경찰과 밀정 감시 등의 역할을 분담하였다. 이때 서울에서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개작·축소해 만세시위 당일 참여자들에게 나눠줄 전단지의 제작과 등사를 담당하였다. 이를 위해 동촌리 신창학교 등사기를 이용해 밤을 세워가며 등사하였다. 3월 20일 이른 아침 제작한 독립선언서 전단지를 나뭇짐과 갓집에 숨겨서 군북 장터로 보내고, 오전 9시 신창학교에서 50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거행된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였다. 이어서 전날인 3월 19일 전개된 함안면 만세시위에 대한 일제 군경의 강경 진압과 주도자에 대한 대대적인 색출에도 불구하고, 오후 1시경 많은 사람들이 만세시위를 위해 모여들었다. 이들과 함께 군북 지역 일대를 돌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5,000명까지 불어난 시위대를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주도하였다. 그러자 군북경찰관주재소에 파견되어 있던 진해만 중포병대대를 필두로 일제 군경이 총검을 휘두르며 공포탄을 발사하는 등 무력으로 진압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폭력적으로 만세시위를 진압하자 시위대와 함께 몸싸움과 투석전을 전개하면서 주재소를 공격하였다. 이처럼 만세시위가 격화되자 일제 군경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였고, 현장에서 21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6월 27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훼기,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다가 취소하여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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