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龜元
趙龜元1897. 2. 4 ~ 1928. 12. 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14)
관련 사건
- · 1919년 강화군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14) 1897년 2월 4일 경기도 강화군(江華郡) 부내면(府內面) 신문리(新門里, 현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에서 태어났다. 강화군의 보창학교를 거쳐 강화공립보통학교와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였다. 『매일신보』 기자와 합일학교의 교사로 근무할 당시인 1919년 3월 18일 강화군 강화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초순부터 강화군에서는 길상면(吉祥面)의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추진되었다. 연희전문학교에 재학 중이던 황도문(黃道文)은 대한제국 군인 출신으로서 은 세공업에 종사하던 개신교인 유봉진(劉鳳鎭)에게 만세시위 소식을 전달하였다. 유봉진은 개신교인 유희철(劉熙哲)에게 강화군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3월 7일부터 8일 사이 강화군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일으키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며, 3월 9일 오후에는 길직리교회에서 전도사 조종렬(趙鍾烈)과 동생 조종환(趙鍾桓), 전 면장 황명희(黃明熙)·황유부(黃有富), 그리고 유봉진·이진형(李鎭亨)·황도문(黃道文) 등이 모임을 가졌다. 그날 모임에서 3월 18일 장날이 서는 강화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 무렵 강화읍내에서 길상면 개신교인들이 주도하는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만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경찰서로 몰려가서 사전에 연행된 인사들을 석방해 주지 않으면 경찰서를 침입하겠다고 경고하였다. 시위대의 기세에 눌린 일제 경찰은 유희철을 비롯해서 사전에 검거된 인사들을 석방하였다. 시위대는 밤늦게까지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행진하다가 밤 11시경에 해산하였다. 일제는 다음 날인 3월 19일 오전 8시에 용산에서 40여 명의 군대를 강화도로 파견해 만세시위를 주도적으로 참여한 인사들을 색출하여 연행하였다. 이때 오영섭 등과 함께 강화군 일대에서 일어나는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을 검거하지 말라는 경고가 담긴 서신을 강화경찰서 경부 이해용(李海用) 앞으로 발송하였다가 일제 군경에 의해서 붙잡혔다. 서신은 “조선독립운동자를 검거하지 말라. 불응하면 목을 베어 죽이거나 방화할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1919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아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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