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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憲壽

鄭憲壽

1877. 2. 6 ~ 1947.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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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鄭憲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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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청양(靑陽)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충청남도 청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기 →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관련 사건

  • · 1919년 청양군 정산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877년 2월 6일 충청남도 청양군(靑陽郡) 정산면(定山面) 해남리(海南里)에서 태어났다.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5일 전개된 청양군 정산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정산면의 만세시위는 4월 5일 정산시장에서 시작되었다. 백곡리(白谷里)의 홍범섭(洪梵燮)·임의재(任毅宰)·윤석희(尹錫禧)·홍세표(洪世杓)·박상종(朴商鍾) 등이 주도한 만세시위는 정산향교 직원 권흥규(權興圭)의 사망을 계기로 4월 6일 목면(木面)으로까지 확대되었다. 4월 5일 오후 3시경 홍범섭 등은 서정리(西亭里)의 정산시장에서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배포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다. 장날의 만세시위를 경계하고 있던 일제 헌병이 즉각 출동하여 시위대의 해산을 명령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30여 명을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하였다. 평화적인 만세시위를 야만적으로 탄압하는 일제 헌병의 폭력에 분노를 참지 못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동참하였다. 체포된 주도자들을 대신하여 권흥규가 시위대를 지휘하였다. 700여 명으로 확대된 시위대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절규하며 헌병주재소로 달려가 연행자 석방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를 이끌던 권흥규가 일제 헌병의 총격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만세시위는 해산되었다. 다음날인 4월 6일 전날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사람들과 함께 권흥규의 시신 인수를 위해 헌병분견소로 갔다. 권흥규의 친인척들과 함께 시신을 인수하여 운구행렬을 조직하였다. ‘배일사권공지구(排日士權公之柩)’라고 쓴 명정(銘旌)을 운구행렬의 선두에 세웠다. 그 뒤로 많은 만장(挽章)이 줄을 이었다. 운구는 고인의 자택이 위치한 목면 안심리(安心里)로 향하였다. 지나가는 길의 각 마을에 상여를 대고, 곳곳에서 노제를 올려 통곡하며 고인의 항일정신을 기리자 주민들이 운구행렬에 동참하였다. 지곡리(池谷里)를 경유할 즈음 운구행렬의 규모는 1,000여 명으로 확대되었고, 이들은 조선독립만세 구호를 외쳤다. 운구행렬 자체가 만세 시위대가 되었다. 이에 일제는 운구행렬이라고 해도 조선독립만세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묵과하지 않고 정산의 헌병파견대 외에 공주(公州)의 헌병들까지 동원하여 목면으로 급파하였다. 공주에서 출동한 일제 헌병들은 운구행렬을 보자마자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흥규의 조카딸 최윤안(崔胤安)과 김국삼(金國三)·유행길(柳行吉)·장응렬(張應烈)·윤광원(尹光遠) 등이 사망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날의 운구 및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는 혐의로 일제 헌병에 붙잡혀 청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1919년 4월 24일 즉결심판에서 만세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이 인정되어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태(笞) 90도(度)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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