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鎭河
鄭鎭河1866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1919년 3월 3일 수안군 수안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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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6)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대천면(大千面) 수치리(秀峙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20년 당시 59세이므로 1866년생으로 추정된다. 1919년 당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3월 3일 수안읍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3월 2일 밤 오관옥(吳觀玉)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으로 권유받았다. 천도교인으로서 평소 조선 독립을 염원하였던 바, 오관옥의 권유에 찬성하여 3월 3일 수안읍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결의하였다. 3월 3일 새벽 6시부터 수안읍 만세시위가 본격화되었다. 천도교 인사들이 이끄는 시위대 130~140명은 수안읍 일대를 행진하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수안헌병분대에 도착한 시위대는 독립을 선언하면서 헌병분대의 즉각적인 퇴거를 요구하였다. 오전 11시경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수안읍에 모인 1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로 행진하였다. 수안헌병분대 앞에 도착한 시위대는 독립을 선언하면서 헌병분대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시위대가 헌병분대 경내로 들어가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 사격을 하였다. 오후 1시경 일제의 사격 소식을 듣자마자 천도교계 주도세력은 150여 명의 시위대를 규합해서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 앞으로 나아갔다. 헌병분대 정문을 돌파한 시위대와 함께 경내와 바깥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헌병분대 퇴거를 외쳤다. 그러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일제히 발포하였다. 일제 헌병의 사격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월 4일부터 일제는 수안군 일대에 시위의 확산을 차단하는 한편, 수안읍 만세시위에 참여한 인사들을 색출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제 군경에 붙잡힌 뒤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그해 1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소요죄로 징역 1년 3월(미결구류일수 중 450일 전시형기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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