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柱夏
鄭柱夏1889. 5. 30 ~ 1939. 7. 12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성군 원곡면‧양성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889년 5월 30일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원곡면(元谷面) 칠곡리(七谷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정성유(鄭聖有)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안성군 원곡면·양성면(陽城面) 연합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일 오후 이유석(李裕奭)·홍창섭(洪昌燮) 등에게 ‘오늘 밤 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이라는 계획을 전달받고, 이에 동의하여 만세시위 참여를 결의하였다. 이날 밤 마을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기 위해 외가천리(外加川里)에 위치한 원곡면사무소로 향하였다. 원곡면의 각지에서 1,000여 명의 주민들이 면사무소 앞에 집결하였다. 이들과 함께 이유석·최은식(崔殷植)·이양섭(李陽燮) 등의 지휘에 따라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유석·최은식·이양섭 등의 주도자들은 시위대를 향해 ‘양성으로 가자’고 외쳤다. 양성면에는 일제의 경찰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등 일제의 지역 통치를 위한 주요 시설이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양성으로 가자는 주도자들의 제안에 호응하여 다른 주민들과 함께 횃불을 밝히고, 시위대열을 조직하여 양성면을 향해 ‘대한독립만세’를 연창하면서 행진하였다. 이날 밤 양성에서도 수백 명의 주민들이 오후 9시경부터 양성의 경찰주재소 앞에 모여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양성의 만세시위 모습을 확인하고, 곧바로 성은고개를 내달려 양성면의 시위대와 합류하였다. 이에 약 2,000명의 규모로 확대된 원곡면과 양성면의 연합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이때 함께 시위에 참여하였다. 이유석·홍창섭·최은식 등의 지휘에 따라 우선 일제 경찰의 주재소로 행진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주재소를 공격하라는 최은식의 외침에 호응하여 주재소에 대한 공격에 참여하였다. 최은식·김원순(金元順)·이국상(李國相)·이유만(李裕萬)·이태영(李泰榮) 등과 함께 시위대의 선두에서 주재소를 향해 돌을 던져 주재소의 창문 등을 깨뜨리고, 안으로 들어가 집기와 기물을 파손하고, 주재소의 부엌에서 솔가지에 불을 붙여 주재소 건물에 불을 질렀다. 다음으로 시위대와 함께 양성우편소와 지역의 주민들 사이에 평소 원성이 높았던 일본인 상인의 상점과 고리대금업자의 자택 공격에 참여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이유만 등과 우편소 안으로 들어가 서류를 폐기하였다. 건물 안의 기물 및 가구들을 건물 밖에서 불태워 버렸다. 다음날인 4월 2일 새벽까지 이유석·홍창섭·이양섭 등의 지휘에 따라 격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한 뒤, 원곡면으로 돌아와 원곡면사무소의 담장을 파괴하고 건물을 소실시킨 후 해산하였다.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격렬한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일제는 4월 3일 조선주차군 제79연대 소속 약 30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만세시위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와 색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군대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내란죄 적용 문제를 두고 오랜 조사와 공판이 이어졌다.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내란죄를 적용하지 않기로 하고 경성지방법원으로 관할 재판소를 지정받았다. 같은 해 8월 1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변호사들의 사법 절차 문제 지적 법정투쟁의 결과 공소 불수리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건조물 소훼죄, 소요죄 등으로 징역 7년(미결구류일수 중 500일 본형 산입)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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