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濟莘
鄭濟莘1886. 4. 23 ~ 1928. 5. 31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2)
관련 사건
- · 1919년 광주군 오포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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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2) 1886년 4월 23일 경기도 광주군(廣州郡) 오포면(五浦面) 추자리(楸自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정제화(濟華)이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28일 문형리(文衡里)의 김인택(金仁澤)·임무경(林武京), 양벌리(陽筏里)의 유면영(柳冕永) 등과 함께 광주군 오포면·경안면(京安面)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새벽 1시 광주군 오포면 일대 산 위의 곳곳에서 횃불이 밝혀지고, ‘조선독립만세’의 외침이 메아리치기 시작하였다. 격렬했던 오포면 각 마을의 연합 만세운동의 시작이었다. 이날 새벽 1시 독립을 위한 만세운동에 찬성한 같은 마을 주민 40여 명을 규합하여 이들을 이끌고 고산리(高山里)의 산 위로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는 횃불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한편, 문형리에서는 같은 시각 김인택과 임무경이 만세운동에 공감하여 동참한 주민 30여 명을 이끌고 뒷동산에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한동안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마을 단위로 새벽의 횃불만세시위를 전개한 오포면의 주민들은 휴식을 취한 뒤, 오전 9시를 기해 마을 단위로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연창하며 추자리에 위치한 오포면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새벽에 횃불만세시위에 참여했던 주민들과 함께 시위대열을 형성하고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문형리·양벌리에서 각각 시위대가 행진하여 면사무소 앞으로 집결하였다. 오전 9시경 오포면 면사무소 앞에 고산리·문형리·양벌리의 주민들이 합세하여 600여 명 규모의 시위대가 조직되었다. 그 후로도 만세시위에 참여하는 주민들은 계속적으로 증가하여 오전 11시경에는 이미 1,500여 명의 대규모 시위대로 확대되었다. 시위대와 함께 광주군청(廣州郡廳)을 향해 행진하였다. ‘조선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치며 군청을 향해 행진하는 과정에서도 만세시위에 공감한 많은 주민들이 합류하여 시위대의 규모는 2,000명 이상으로 확대되었다. 도착하여 시위대와 함께 광주군청을 에워싸고 군청사와 광주우편소(廣州郵便所)를 습격하기 시작하였다. 일제 헌병대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겨누며 군청과 우편소에 시위대의 공격을 막으려 하였다. 이러한 일제 헌병대의 행위는 시위대를 더욱 자극하였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군청과 우편소를 향해 돌을 던져 유리창을 파괴하고, 다수의 힘으로 군청사 안으로 밀고 들어갔다. 이에 일제 헌병들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로 발포하였다. 이로인해 사상자가 발생하고, 만세시위는 해산되었다. 이러한 만세시위 과정에서 일제 헌병대에 붙잡혔고, 이후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5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풀려난 이후에도 계속되는 일제 경찰의 감시와 박해 때문에 1928년 5월 31일 자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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