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칠
鄭光七1872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김성오(金成五)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족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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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1995) 강원도 강릉군(江陵郡) 신리면(新里面) 성황오리(城隍五里)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08년 재판 당시 38세이므로 1872년생으로 추정된다.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08년 김성오(金成五) 의진에 가담하여 강원도 강릉·양양(襄陽)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였다. 1907년 일제가 헤이그 밀사를 빌미로 삼아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늑약)에 의해 군대를 강제 해산하자, 해산 군인들이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체계적이고 대규모적인 항쟁이 전개되었다. 강원 지역은 특히 유림들의 척사이념이 철저하였고, 지역적인 특성과 맞물려 산포수가 많아 전투 역량이 높았다는 점, 산악지대를 이용한 유격전으로 무기 등 열세적인 조건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강릉·원주(原州)·춘천(春川) 일대를 거점으로 하여 1907년 정미의병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에 일제는 이른바 ‘북부수비구대토벌작전’을 수립하여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08년 김성오 의진에 참여하여, 같은 해 4월 10일 의병 50여 명과 함께 강원 양양 공자묘(孔子廟)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여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일제의 강력한 무기를 앞세운 공격과 체포 작전으로 인해 결국 붙잡혔다. 1908년 10월 22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강원도 양양에서 폭도 괴수 김성오 부하에 가입하여 총기를 휴대하고, 약 50명과 같이 동월 10일에 양양군 공자묘 부근에서 일본 수비대와 교전하였다”는 이유로 유형(流刑) 3년을 받고 고초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명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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