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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태

鄭敬泰

1878 ~ 1911.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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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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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춘천(春川)의병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강원도 춘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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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성익현 의병부대

포상 정보

  • · 애국장(1991)

관련 사건

  • · 후기의병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1) 강원도 춘천(春川) 출신이다. 판결문에 따르면 1911년 재판 당시 34세이므로 1878년생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정경태(鄭敬台)이다. 주소지는 재판기록에 춘천군 군내면(郡內面) 수림계(水臨溪)로 언급되어 있지만, 춘천에는 관련 지명이 없어 정확한 지역을 알 수 없다. 의병에 투신하기 전에는 농업에 종사하였으나, 다른 기록에는 의병에 가담하기 이전에 강릉군(江陵郡) 강릉읍(江陵邑) 동문 내에서 주막(酒幕)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1907년 7월 일제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을 체결, 비밀리에 조약의 부속 각서에 근거해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8월 1일 이에 반발한 서울의 시위대 봉기가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의병운동이 확산되었다. 강원 지역에서도 8월 5일 민긍호(閔肯鎬)가 원주 진위대 해산을 거부하고 봉기한 이후 횡성(橫城)·홍천(洪川)·춘천을 비롯해 강원도 전 지역에서 여러 의병장들이 각각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봉기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7년 (음)7월 23일 성익현(成益鉉) 의병부대가 거의하였다. 성익현은 춘천 출신의 유생으로, 군대 해산 직후 봉기하여 스스로 ‘관동총독(關東總督)’, ‘관동창의대장(關東倡義大將)’으로 칭하며 삼척(三陟)·울진(蔚珍)·평해(平海)를 거점으로 활동한 의병장이다. 성익현이 거의할 때 가담하여 도총장(都總將)에 임명되었고, 이후에는 중군장(中軍將)이 되어 활동하였다. 1907년 9월 2일 성익현 의병부대에서 부장 이상렬(李相烈) 등과 함께 33~35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평해의 경무고문분견소(警務顧問分遣所)를 공격하였다. 일본순사 시라카와(白川公明) 코가와(古川八太郞) 및 순검 손용즙(孫鎔輯)·황석진(黃錫軫) 등과 1시간 가량 교전하여 패퇴시킨 후 분파소를 파괴하고 권총 2정·도검 2자루·의류 수점 및 공문서 등을 노획하였다. 이어 이상렬과 함께 약 40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울진군 읍내에 들어와 군청 군기고에 있던 화승총 25정·활 2장·화살 30속을 군수로 확보하였다. 10월 12일에는 부하 270명을 거느리고 평해읍내(平海邑內)에 와서 군아(郡衙)를 공격하여 돈 4백 원을, 이어 상리면(上里面) 상성저동(上城底洞)에서 말 2필을 군자로 획득하였으며, 18일에는 원북면(遠北面) 척산동(尺山洞)에서 소 1필과 돈 674원을 군자로 거두었다. 군자금을 확보한 부대는 10월 18일 성익현·변학기(邊鶴基)·정정진(鄭正眞) 등과 500여 명의 대규모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울진 읍내의 경무분견소를 공격하였다. 분견소를 수비하던 쿠메(久米) 경부 등과 8시간에 걸쳐 교전 끝에 이들을 패주시키고, 분견소와 군청·우체소 및 부속관사·민가 등을 불태우고 군기와 군자를 노획하였다. 이때 함께 참여한 정정진은 이강년 부대소속으로 부장·중군장을 맡고 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부터 성익현 의병부대는 정정진이 인솔하는 이강년(李康秊)의 부대와 연계하여 함께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10월 31일 정정진과 다시 연합하여 7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삼척읍(三陟邑) 일본수비대를 공격하기 위해 삼척군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던 중 미로면(未老面)의 산 중에서 일본수비대와 조우하고 교전하여 의병 4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울진을 중심으로 의병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일제는 삼척에 주둔한 일본군토벌대를 보냈다. 의병 400여 명을 거느리고 울진읍 내 구만동·계원동·무월동에 진을 치고 있던 성익현 의병부대는 12월 7일 삼척분파소 주둔 토벌대가 삼척에서 죽변을 통해 울진읍내로 향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부대를 퇴각하였다. 이후 토벌대의 공격을 피해 1908년 4월 삼척·울진·평해 산속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며 간헐적으로 일제 군경과 교전을 지속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토벌대의 공격으로 위축된 의병부대의 규율을 재확립하기 위해 당규(黨規)를 위반한 부대원 최봉삼(崔鳳三)을 울진군 서면(西面) 소조동(召造洞) 김원일(金元一)의 집 동쪽 밀밭에서 총살하기도 하였다. 1908년 5월 성익현 의병부대는 이강년·김상태(金相泰) 등의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1,000여 명의 의병들을 인솔하여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내성(內城)을 점령하기로 결정하였다. 연합한 의병부대는 같은 달 17일 봉화의 서벽과 18~19일 내성에서 일제 군경과 격전을 벌였지만 실패로 끝났다. 내성 확보에 실패한 성익현은 6월경 국내에서 종적을 감추었는데, 일설에는 후일을 도모하기 만주를 건너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익현을 대신하여 관동창의대장이 되어 의병을 지휘하였다. 일제 군경의 의병에 대한 진압이 더욱 강력해진 악조건의 상황에서도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의병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1910년 2월 23일 의병 20명을 거느리고 울진 서면 방면에서 울진헌병분견소 일제 헌병과 교전을 벌였다. 그러한 가운데 의병활동을 방해하는 부일배를 처단하였다. 1910년 (음)3월 6일 밀정 역할을 하던 봉전동(鳳田洞) 면장 장두의(張斗儀)를 체포하여 처단하였다. 그리고 (음)5월 24일 체포되어 살해된 의병의 목을 베며 일제에 협조했던 원북면(遠北面) 상원당동(上元塘洞)에 거주하는 찬옥(贊玉, 일명 홍순학(洪淳鶴))을 부하 정익서를 시켜 결박하여 총살하였다. 이처럼 의병부대의 활동이 위축된 상황에서도 간헐적으로 전투를 벌이며 밀정이나 친일적인 동장을 응징하면서 활동하였으나, 1911년 6월경 울진군 서면 소광리에서 일제 헌병보조원 장(張)모에게 붙잡혔다. 1911년 8월 10일 함흥지방재판소 원산지부에서 이른바 강도죄, 방화죄, 고살죄로 교수형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같은 해 10월 25일 경성공소원에서 기각되었다. 재차 상고하였지만, 그해 11월 10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었다. 같은 달 22일 경성감옥에서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원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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