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인명사전 -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1880. 2. 27 ~ 1951. 3.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 · 신한민보사
- · 흥사단
- · 미주한인연합회
포상 정보
- · 독립장(1995)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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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1995) 1880년 (음)2월 27일 서울에서 부친 홍학순(洪淳學)과 모친의 6형제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1881년생으로 추정된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호는 동해수부(東海水夫)이고, 해옹(海翁)과 추선(秋船)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초명은 홍종표(洪宗杓)였으나 미주에서 홍언(洪焉)으로 개명하였다. 영어이름은 리처드 홍이었다. 흥사단 이력서에 의하면 10대 후반까지 10년을 가정에서 수학하고 1894년부터 1902년까지 경기도 광주(廣州)와 강원 춘천(春川)에 거주하였으며, 1902년부터 1904년까지 중국 각지를 다니며 1902년 양지사무소(量地事務所)에 관여하고 이후 사숙에서 가르쳤다고 한다. 1904년 9월 16일 게릭호(Gaelic) 편으로 혼자 미국 하와이로 노동이민을 갔는데, 넷째 형인 홍경표가 그보다 1개월 반 먼저 도착해 있었다. 1907년까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다가 『대한자강회 포와부(布哇府) 지회월보』의 편집을 맡기 시작하여 이후 『자신보(自新報)』와 『합성신보(合成新報)』, 『신한국보(新韓國報)』의 편집을 맡았다. 1908년 기독교 세례를 받았으며, 기독청년회 활동도 하였다. 하와이에서는 자강회와 한인합성협회-국민회-대한인국민회로 이어지는 단체에 관여하였다. 1911년 8월에는 『대동위인 안중근전(大東偉人安重根傳)』을 저술하여 신한국보사에서 발행하였다. 이 안중근 전기는 16면에 걸쳐 생애와 의거, 재판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는데, 국문으로 작성되었다. 이어 샌프란시스코에 위치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신한민보(新韓民報)』의 주필에 선임되어 미주 본토에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12월에는 북미지방총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러시아와 유럽을 거쳐 미국에 돌아온 안창호(安昌浩)를 만났다. 신한민보사 주필 또는 기자로서의 활동은 신문사나 개인 사정으로 여러 차례 중단되기도 하지만,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1913년에는 샌프란시스코한인감리교회(桑港한인감리교회)의 청년회 회장직을 맡았고, 북미지방총회 대의회 의장으로도 활동하였다. 신한민보사의 직임을 사임한 뒤에도 기사를 집필하며 북미지방총회 일을 병행하였다. 또한 안창호가 추진하던 흥사단(興士團) 창립에도 적극 관여하여 창립위원장을 맡고 경기도를 대표한 제7단우로 참여하였다. 1915년 초부터 다시 신한민보사의 편집원이나 주필로 근무하여 1918년 말까지 재임하였고, 북미지방총회 총무직도 겸하였다. 신한민보사를 사임한 후에는 1919년 3월부터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중화인(中華人) 교섭위원으로 선임되어 화교(華僑)를 대상으로 독립자금 모금에 나섰다. 1921년 6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구미위원부 화교위원으로 임명되어 페루·칠레·에콰도르·자메이카 등 중남미지역을 순행하며 그곳 화교들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거두었다. 1924년 전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가 같은 해 12월 일시 미국에 돌아온 안창호와 재회하였고, 계속 『신한민보』에 기고하였다. 1925년 말 흥사단 사업과 관련된 일로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1926년부터 1년간 중남미를 돌며 상업 활동을 하였다. 1930년 전후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대동단결을 내세우며, 미주 한인단체의 통합운동에도 진력하여 1931년 미주한인연합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上海)에서 윤봉길(尹奉吉) 의거가 있었고 안창호가 일제에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안창호는 1931년 11월 6일자로 홍언에게 흥사단의 장래와 독립운동방략을 논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내용은 만주사변 이후 중국에서의 한국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대당(大黨) 조직과 한중(韓中) 합작을 강조하며, 동지·이론·재정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였다. 이러한 안창호의 의견에 동조하고,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과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화교를 대상으로 한중합작을 주장하는 논설을 화교신문에 발표하였다. 이후 미국을 비롯하여 캐나다·호주·쿠바·멕시코 등지의 화교들에게도 문명(文名)을 널리 알려 미국 각지 화교의 초청을 받기도 하였다. 1938년 3월 안창호가 국내에서 서거하자 『영애록』을 편찬하였으며, 로스앤젤레스로 옮긴 신한민보사의 편집 직원으로 상근하였다. 1940년 1월 다시 신한민보사의 주필에 선임되었으며, 위원제로 바뀐 대한인국민회 대표회 서기와 중앙집행위원 겸 서기, 중앙상무위원도 함께 수행하였다. 1940년대에 들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의 활동을 널리 소개하며 적극적으로 지지하였다. 1943년 6월 신한민보사 주필직 사임을 청원하자, 국민회 중앙상무부는 사임을 받아들이고 명예기자로 선임하여 국민회의 기록존안과 통신사무를 맡기며, 『신한민보』의 편집에 협조하도록 조치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인국민회의 역사를 정리하는 일에 진력하여 『신한민보』 1944년 2월 3일자부터 1945년 3월 1일자까지 「국민회 략사」를 총 52회 연재하였다. 1945년 2월 다시 신한민보사의 편집을 맡고 9월부터 주필을 맡았다. 1910년대부터 시조와 소설·기행문·희곡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학작품과 사설·논설·칼럼·기사·번역 등을 『신한민보』에 발표하였다. 아울러 역사와 전기에 깊은 관심을 두어 『대동위인 안중근전』을 저술한 이후에도 이갑(1918)·윤봉길(1937)·이동녕(1940)·김구(1940) 등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선교사 사무엘 모페트(1938) 등의 전기도 발표하였으며, 국민회의 역사 정리에 진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최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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