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鍾大
趙鍾大1873. 1. 24 ~ 1922. 7. 25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한독립애국단 철원군단
포상 정보
- · 독립장(1963)
관련 사건
- · 국채보상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독립장(1963) 1873년 1월 24일 황해도 금천군(金川郡) 금천면(金川面) 금릉리(金陵里)에서 태어났다. 이후 강원도 철원군(鐵原郡)으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후 한의학을 공부해, 강원도 철원면(鐵原面) 당동(棠洞)에서 약종상(藥種商)을 하였다. 1905년 4월 이동휘(李東輝)가 경기도 강화(江華)에서 설립·운영하던 사립 육영학교(育英學校)에 찬성금으로 20원을 황성신문사를 통해 기부하였다. 1906년 6월 철원군수 나수연(羅壽淵)이 군내 공립소학교를 확장하여 중학과정까지 설치하려고 군내 유지들을 모아 도움을 요청하자 10원을 기부하였다. 1907년 초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 국채보상의연금 철원군 발기인으로서 의연금 52원 92전을 모아, 4월 2일 대한매일신보사로 보냈다. 같은 해 9월 6일 대한매일신보사 지사원에 임명된 후, 폐간되는 1910년까지 철원지사를 맡아 운영하였다. 1908년 철원군에서 사립 배영학교(培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어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09년 12월경 철원군의 보통학교 부훈도 김명제(金明濟)·박영희(朴榮喜), 학무위원이자 부호인 강대려(姜大呂)·이봉정(李鳳正), 잡화상 김창윤(金昌胤) 등과 함께 ‘합방 반대연설회’를 서울에서 개최하며 일진회(一進會) 일파를 공격하고자 협의하고, 「합방 반대 결의서」를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결의서는 김명제가 기초한 후 학교 교원과 면장·이장 등에게 날인시키고, 10명 단위로 모아 200여 명이 넘는 날인자 명단을 1909년 12월 19·20일경 서울 상동교회 전덕기(全德基) 목사에게 발송하였다. 이 사실이 일제에 탐지되어 조사를 받았고, 이 일로 『대한매일신보』가 폐간되고 학교마저 재정난으로 폐교되자, 철원군을 떠나 상경해 전덕기 목사가 담임하던 상동교회에 출석하였다. 이후 남감리교 선교사 크램(Willard G. Cram)의 권유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성경책을 파는 매서인(賣書人)으로 활동하였고, 황해도 평산군(平山郡)에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농한기에는 황해도 금천군 일대를 순회하며 전도 활동을 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참여하였다. 이어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는 한국인 관리 동맹 퇴직운동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같은 해 8월 21일경 철원군으로 내려가 철원면 중리(中里) 조기윤(趙基允) 집에 머무르며 친분이 있던 강대려를 만나 계획을 논의하였다. 이에 대해 강대려는 자금 모집이 어려울 것이라고 하면서, 만남 직전인 8월 11일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김상덕(金相德)·박연서(朴淵瑞)·김완호(金完鎬)·이용우(李用雨)·이봉하(李鳳夏) 등과 함께 조직하고 자신이 서무과장을 맡고 있던 대한독립애국단 철원군단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강원도 각 군을 순회하며 민정을 시찰하고 각 지역 유지자를 설득하여 애국단 군단(郡團)을 설립하는 일을 맡아 달라는 권유를 받았다. 이 권유에 찬성하여 즉시 애국단에 가입한 뒤, 원주군·횡성군·강릉군·양양군·김화군·철원군 등을 순방하며 기독교회 주요 인물과 유지 등을 만나, 군단 설치 권유와 퇴직자 구제자금·독립운동자금 등을 모금하였다. 1919년 9월 26~27일경 서울에서 원주군으로 내려가 조윤여(趙潤如) 목사를 찾아가 “애국단의 군단(郡團)을 원주군에 설립하고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와 연락하여 그 명령을 따라 독립운동을 실행하며 군단의 상황을 보고하는 등” 통신 임무를 맡아달라고 권유하여 숙고해 보겠다는 대답을 받아냈다. 다음날 횡성군의 방기순(方基淳) 목사를 찾아가 같은 내용으로 권유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9월 29일경 이른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겪었던 강릉군 안경록(安慶祿) 목사를 찾아가 다시 같은 내용의 권유를 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자 그곳에서 재목상을 하는 엄성훈(嚴成勳)과 그의 장남 엄정섭(嚴政燮)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엄성훈에게는 평창군단 조직을, 엄정섭에게는 울진군·삼척군·평해군(平海郡) 군단 설립을 부탁하였고, 강대려에게 연락하여 10월 초 여비조로 100원을 전보환으로 보내주었다. 10월 2일경에는 양양군의 양양교회 목사 김영학(金永鶴)을 찾아가 애국단 ‘군면단설치(郡面團設置) 및 유지의 청년을 모집하여 중국 상하이로 보내 임시정부에 투신하게 하고 그 비용은 부호로부터 모집하라’고 권유하여 승낙을 받았다. 10월 5일경 김화군 이장욱(李章郁)을 방문하여 애국단 통신 연락을 맡아줄 것을 권하였으나, 거절하자 즉시 철원으로 돌아가 강대려에게 결과를 보고하였다. 이때부터 1920년 1월 하순까지 본래 추진하였던 한국인 관리 퇴직운동과 독립운동자금 모집을 위하여 철원면 월하리(月下里)의 박용삼(朴容三)·김응환(金應煥)·고운하(高運河) 등 부호를 차례로 찾아갔으나 모두 거절당하였다. 1920년 1월 20일경 친일부호의 밀고로 붙잡혀 동지 33명과 함께 기소되었다. 1920년 12월 2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신현구(申鉉九)·신상완(申尙玩)과 함께 사건 주도자로 지목되어 모두 징역 5년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동지 13명과 함께 항소하였으나, 1921년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다시 “자신의 행위는 조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므로 법으로 금지할 수 없다”며 홀로 상고하였지만, 그해 4월 9일 고등법원에서 최종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1922년 3월 서대문감옥에서 함흥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고문 후유증으로 병들어 고초를 겪다가 같은 해 7월 25일 함흥감옥에서 끝내 사망하였다. 7월 27일 아들 조성범(趙聖範)이 시신을 인수하여 철원에서 장례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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