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卜先
趙卜先1894. 7. 7 ~ 1961. 3. 5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1919년 안동군 임하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4년 7월 7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안동면(安東面) 안기동(安奇洞, 현 안동시 안기동)에서 태어났다. 이후 임하면(臨河面) 금소동(琴韶洞)으로 이주하였다.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조복선(趙福先)이 있다. 1919년 3월 21일 안동군 임하면 금소·신덕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1일 서울 파고다 공원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독립선언서 10장을 가지고 고향인 임하면 금소동으로 귀향한 임찬일(林贊逸)은 안동면의 김원진(金源鎭)과 만세운동을 논의하였다. 이후 그들은 같은 마을에 사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노말수(盧末守)·박유석(朴有石)·임동숙(林東淑)·유북실(柳北實)·임춘섭(林春燮)·임석현(林錫鉉) 등과 함께 만세운동의 계획에 참여하였다. 동지들과 처음 만세운동을 계획한 것은 16일 길안면(吉安面)에서였다.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를 전개하기로 하였지만, 당일에 호응하는 사람 수가 적어 날짜를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3월 21일 임하면 금소동에서 모인 후 신덕동(新德洞)으로 행진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신덕동에는 면사무소와 경찰관주재소가 있어 보다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해서 계획하였다. 거사 당일인 21일, 동지들과 약속한 금소동 마을 앞으로 향하였다. 오후 6시경 약속 장소에 도착하니 만세운동을 계획한 동지들과 금소동 주민뿐만 아니라 만세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모인 백여 명의 군중이 있었다. 먼저 동지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모여 있던 주민들도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금소동에서의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펼친 뒤 시위대를 이끌고 계획한 대로 신덕동으로 향하였다. 금소동을 지난 신덕동으로 향하는 동안 시위에 동참하는 군중은 점점 더 늘어났으며, 오후 9시경 경찰관주재소에 이르러서는 300여 명이 함께하고 있었다. 주재소에 도착하자 그곳을 포위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많은 군중이 주재소를 에워싸고 ‘만세’를 부르자 그곳에 있던 일제 경찰들은 시위대를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하여 총탄을 발포하였다. 갑자기 날아든 총탄에 시위대와 함께 피신하였다. 오후 11시경 사상자 발생에 격분한 시위대를 이끌고 다시 주재소로 몰려갔다. 동지들과 함께 먼저 주재소 출입문과 창문, 벽에 돌을 던졌고, 이어 군중도 합세하였다. 시위대를 이끌고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문과 기물 등을 파괴하고 호구조사부 등의 문서도 모두 파기하였다. 한편, 주재소 앞마당에서는 유북실(柳北實)이 군중과 함께 소나무 한 그루를 뽑아 버렸다. 주재소에서 투석전을 끝낸 후 또다시 시위대를 이끌고 55m 정도 떨어진 면사무소로 향하였다. 면사무소에 도착한 다음에는 돌과 몽둥이로 사무소 벽을 허물고 창문과 가스등을 부숴버렸다. 이어 사무실 안에 들어가 집기와 문서 등을 모두 파기하였다. 면사무소에서 시위를 끝낸 후 자진하여 시위대를 해산하였다. 시위가 끝난 주재소와 면사무소 건물은 지붕과 기둥만을 남긴 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일제 경찰은 다음날부터 만세운동 주도자와 참여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 작전을 펼쳤고 이때 붙잡혔다. 이후 5월 29일 대구지방법원으로 이감되어 예심을 받았다. 7월 4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궐석재판으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정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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