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林鳳鎬

鳳鎬

1918. 10. 13 ~ 1999.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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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林鳳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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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淳昌)학생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북도 순창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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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수원고농 한글연구회

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제3차 수원고농 사건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918년 10월 13일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인계면(仁溪面) 갑동리(甲洞里)에서 인계면장을 지낸 아버지 임기주(林璣周)와 어머니 조현성(趙賢性)의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택(平澤)이다. 1939년 12월 2일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이성애(李成愛)와 결혼하여 슬하에 3남(효락·방락·응락) 1녀(랑자)를 두었다. 1926년 순창공립보통학교에 들어가 1932년 졸업하였으며, 그해 4월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전주고보 재학 시 일본어 사용을 거부하다가 밀고 당해, 수차례 훈계와 처벌을 받았다. 1937년 3월 전주고보를 졸업하고, 그해 5월 18일 수원고등농림학교 수의축산과에 진학하였다. 수원고농에는 소수 한국인 학생들이 사용하는 기숙사인 일명 ‘동료(東寮)’와 다수 일본 학생들의 기숙사인 ‘서료(西寮)’가 있었는데, 이들 사이에는 차별·학대·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그러자 동료에서는 “조선인다운 정신을 잊지 말고 일치단결하여 일본인에게 대항하는 것”이라는 ‘동료’ 정신이 강조되었다. 1939년 4월 중순 동료회 자리에서 료장(寮長) 정주영(鄭周泳)이 「장래를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조선 문화를 부활해 조선을 독립시켜야만 한다”는 내용에 깊이 공감하고, 조선 문화를 부활시켜 독립국가의 창설을 희망하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11일 오후 7시경 기숙사 제4료 6호실에서 정주영·민병준(閔丙駿)·김상태·김중면(金重冕)·김윤하·송장헌·정창순·김종활 등과 함께 한글과 조선 문화를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글연구회’를 조직하자는 취지에 찬성하였지만, 연구를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회원으로는 가입하지 않았다. 한편, 수원고농에 재학중인 한국인 전부는 축구부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었다. 3학년 때 축구부 주장을 맡고, 1940년 1월 하순 오후 6시 30분경 제5료 6호실 동료회 모임에서 학생 60명에게 “축구부 정신을 더욱더 앙양해 목적달성에 매진하라”고 선동하기도 하였다. 이는 축구부 정신이 ‘동료’ 정신과 별개가 아니므로 조선인다운 정신을 잊지 말고 일치단결하여 일본인 학생에게 대항하고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민족 독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1940년 3월 수원고농을 졸업하고, 그해 6월 전북지방산업기수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21일 진안군(鎭安郡)으로 부임해, 진안면 군상리의 국본영림(國本永琳) 집에 거주하였다. 1941년 3월 20일 오후 7시 군상리의 집에서 중학교 후배인 연안휘일(延安輝一)에게 “축구부는 일치단결하여 일본인 학생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민족의식 앙양에 힘썼는데 우리는 조선인이라는 의식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하여 찬동을 얻었다. 8월 20일 오전 11시 집에서 연안휘일에게 “내선일체란 이름뿐이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 냉대”라고 말하며 일제 정책을 비판하였다. 8월 하순에도 군하리 우화정(羽化亭)에서 연안휘일에게 “조선인다운 의식을 잊지 말라”고 하면서 민족의식을 앙양시키고자 하였다. 1942년 4월 상순에는 진안면 군상리 신석창(辛錫昌)의 집 온돌방에 연안휘일과 모여 신석창과도 한국 독립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1941년 4월부터 함남 갑산공립농림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동창생 김중면이 학생들에게 민족사상을 선전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이 일로 같은 해 9월 한글연구회 연루자로서 대다수 회원들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결국 관련자로 붙잡혀 수원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43년 3월 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44년 6월 1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광복 이후 학교 교사로 재직하다가, 1955년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수의과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후 전남대 농과대 학장과 명예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1984년 2월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조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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