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相玉
河相玉1887. 5. 22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대동보국회
- · 대한인국민회
- · 흥사단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1)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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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포장(2011) 1887년 5월 22일 서울 상사동(相思洞)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건홍(河建泓)과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하상만(河相萬)이다. 아버지는 철물용달회사를 운영하다 1903년 사망하였고, 아래로 남동생 하금동(河今東)과 여동생 하순희(河順姬)가 있다. 1905년 하와이 이민 당시 여동생의 보정여학교(普正女學校) 1년 선배인 우숙자(禹淑子)와 약혼하였다. 1914년 6월 12일 우숙자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자, 그해 7월 5일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에서 결혼하였다. 이후 아내에게 하명원(河明媛)이란 새 이름을 지어 주었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으며, 자녀들은 미군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어린 시절 서울에서 계산보통학교를 다녔고, 13세부터 16세까지 한성사범학교 소학과를 3년간 수학하였다. 1905년 단신으로 인천에서 몽골리아호를 타고 2월 2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하와이에서 1년간 노동하다가 1906년 미 본토로 이주하였다. 그해 7월 하순 양주은(梁柱殷) 등과 함께 공립협회(共立協會) 샌프란시스코지방회(桑港地方會)에 입회를 청하였다. 1907년 1월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가 조직되자 새크라멘토에서 동료들과 함께 대동보국회에 가입하고, 새크라멘토지방회를 조직하였다. 1910년 2월 대동보국회가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에 통합되자, 대한인국민회 회원이자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0년부터 양식 요리사로 생계를 꾸리는 한편, 그해 5월 리버사이드에 거주하면서 클래몬트학생양성소 재정을 후원하였다. 1911년 4월 리버사이드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하였다. 그해 7월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이갑(李甲)을 위해 재미한인들과 256달러 50센트를 모아 후원하였다. 같은 해 9월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으로 귀환하자, 강영소(姜永韶) 등과 함께 동맹수련운동을 시작하여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운동을 계승하였다. 1912년 1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구제원으로 선임되어 회장 홍언(洪焉), 대의원 안창호·강영소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3년 남감리교회 교인이 되었고, 그해 4월 흥사단(興士團) 창립을 위해 홍언·강영소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 강영소의 집에서 안창호의 지도 아래 강영소·홍언 등과 함께 흥사단을 창립하고 제1번 단우가 되었다. 7월 30일 안창호로부터 흥사단 창립위원회 개최를 요청받자, 1차 위원회의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하자는 의견을 편지로 보냈다. 1914년 1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총무 김필권이 사업 관계로 사임하자, 후임 총무로 선임되었다. 1915년 4월 흥사단 예연금 100달러, 단보비 40달러, 위로금 50달러 등 190달러를 납부하였다. 그해 6월 흥사단 검사부에서 각 지역 검찰원을 선임할 때, 샌프란시스코 지역 검찰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달 국민회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으로 지방회 사무소를 이전하였고, 7월 지방회 산하에 토론회를 조직하였다. 8월 샌프란스시코지방회 주최로 국치기념식을 거행하였다. 1916년 1월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에서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과 부회장 취임식이 거행되자, 전례집행 인접원으로 취임식 진행을 보좌하였고, 아내 하명원은 창가를 불렀다. 그해 3월 로스앤젤레스 대의원으로 북미지방총회 7회 대의원회에 참석하여 총회장 강영소로부터 총회 재무로 선임되었다. 1917년 1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법무로 선출되었고, 2월 북미지방총회 제8회 대의원회에 로스앤젤레스 대의원 송종익(宋鍾翊) 대리로 참석하였다. 그해 3월 북가주 한인남감리회 지방연회가 감독 램버트의 주최로 개최되자, 샌프란시스코 지방대표로 출석하였다. 그해 8월 29일 국치기념일을 맞이하여 아내를 비롯하여 동료들과 함께 1일 공금을 수합하여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로 송금하였다. 같은 해 12월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차기년도 총무로 선출되었으나, 이듬해 1월 지방회 회장 임정구의 사임으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 청년회 인재국장으로 선임되었고, 31일 지방회 회장으로 샌프란시스코 국어학교 개교식을 주관하였다. 1918년 4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콜로라도주 푸에블로(Pueblo)로 이주한 뒤, 4월 14일 김원용(金元容) 등과 함께 지방회를 조직하고 총회 인준을 받았다. 지방회 임원 선정시 구제원으로 선정되었으나, 8월 구제원을 사임하였다. 그해 12월 푸에블로지방회 통상회에서 차년도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푸에블로지방회에 있었던 1918년 11월부터 1919년 12월까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독립운동을 위해 독립운동자금을 후원하였다. 1919년 푸에블로지방회 회장으로 2월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개최하였고, 4월 ‘대한공화국 건설과 신정부 조직’을 축하하는 경축식을 거행하고 그 취지를 설명하였다. 같은 해 5월 푸에블로지방회의 사임 임원을 보궐 선임할 때, 대의원으로 선임되었다. 그해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적십자회 본부의 명령으로 신한민보사에서 미주지부를 설치하고 회원과 회비를 모집하자, 푸에블로지방회 한인들과 지부에 가입하고 회비를 납부하였다. 1920년 3월 푸에블로지방회에서 삼일절 경축식을 개최할 때, 경축식을 주관하고 ‘이날을 어떻게 지킬고?’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아내는 국가와 한반도가를 부르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그해 5월 구미위원부 푸에블로 지방위원 우흥태와 신기선이 공채금을 모집하자 25달러를 기부하여 푸에블로 지방에서 총액 230달러를 구미위원부 재무 송헌주(宋憲澍)에게 송금하는 데 일조하였다. 1920년 7월 다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하였다. 그해 12월 북미지방총회 12차 대의원회가 개최되자, 와이오밍 대의원 대리로 참석하였다. 이 대의원회에서 차기년도 북미지방총회 재무로 선임되었다. 또한 1921년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으로도 선출되었다. 그해 1월 북미지방총회 1921년도 1차 임원회에 참석하였고, 2월 북미지방총회와 샌프란시스코지방회가 합동으로 국민회 창립기념 축하회를 거행하자 샌프란시스코지방회장으로 축하회를 주관하였다. 같은 해 12월 국민회 총회 13차 대의원회에 참석하여 1922년도 재무로 다시 선임되었고, 가옥방매금 대금 처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2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총무로 선임되었고, 그해 11월 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3년 1월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 엡웻청년회 전도국장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2월 지방회 주최로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거행하고 개회와 개회 취지를 설명하였다. 같은 해 5월 11일 샌프란시스코에서 김현구(金鉉九) 등 16인과 함께 민립대학후원회(民立大學後援會)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11월 차기년도 샌프란시스코지방회 회장으로 다시 당선되었다. 1924년 2월 지방회 주최로 국민회 창립기념식을 개최하고 취지를 설명하였고, 그해 3월 지방회 주최로 삼일절 경축식 준비위원이자 의장으로 경축식을 거행하였다. 같은 해 4월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에서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 의사 의거 축하회를 열자, 지방회장으로 참석하여 축사를 하였다. 1931년 4월 샌프란시스코한인교회 임원으로 활동하였고, 그해 10월 1일 홍언 등과 함께 미주한인연합회(美洲韓人聯合會) 선전부 위원이 되었다. 1945년 6월 태평양전쟁에 참전한 한인 2세들의 기념비 등을 세우기 위해 조직된 한족출정군인친족회에 신입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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