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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昌德

崔昌德

1892. 9. 25 ~ 1977.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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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지금 알아보는 인물 · 崔昌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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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미주방면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서울특별시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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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대한인국민회
  • · 흥사단
  • · 하와이대한인교민단
  • · 중한민중동맹단
  • ·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포상 정보

  • · 건국포장(2014)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2014) 1892년 9월 25일 서울 다동(茶洞)에서 아버지 최석환(崔錫煥)과 어머니 운경(雲卿) 사이에서 4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1917년 당시 아버지는 교회 유사(有司)였고, 큰형 최재근(崔在根)은 재판소 서기, 둘째형 최재현(崔在賢)은 측량기수, 동생 최재익(崔在翼)은 학생이었다. 초명은 최귀정(崔貴禎)이고, 본명은 최재덕(崔在悳)이었으나, 1921년 9월 미국에서 하와이로 건너가면서부터 최창덕(崔昌德)으로 개명하였다. 이명은 최재진(崔在眞)이고 영어명은 (Choy Chang Duk)이다. 서울 경성고등학교에서 수학하고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상동(尙洞) 공옥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일본어에 능통하고 미술과 부기가 특기였다. 1914년 미국 감리교 목사이자 총감독인 해리스(Merriman Colbert Harris)의 보증으로 미국에 올 수 있었다. 그해 6월 13일 시베리아(Siberia)호 배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다음, 이민국 검사를 거쳐 6월 19일 상륙하였다. 이후 미주 한인의 최고기관인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회원으로 가입하여 국민의무금을 매년 5달러씩 기부하였다. 1915년 4월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Riverside) 한인교회에서 집사로 근무하였다. 1916년 2월 대한인국민회 로스앤젤레스지방회(羅城地方會) 부회장으로 활동하였고, 7월 대한인국민회에서 한인들을 위해 운영하는 하기강습소 재정을 위해 1달러를 후원하였다. 1917년 리버사이드지방회 총무로 활동하면서 6월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였다. 같은 해 9월 대한인국민회의 가옥채 보상금 3달러를 후원하였다. 11월 리버사이드지방회 차기년도 임원 선거에서 다시 총무로 선임되었다. 1918년 4월 리버사이드지방회 통상회에서 국어학교 교직원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12월 리버사이드지방회의 1919년도 임원 선거에서 부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919년 2월 국민회 창립경축식에서 기도하였고, 4월 독립의연금 10달러를 기부하였다. 그해 6월 로스앤젤레스 부근 산타 바바라(Santa Barbara)의 한인친목회 회장으로 친목회 1주년 기념식을 개최하고 취지를 설명하였다. 같은 해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적십자회 본부의 명령으로 미주지부인 신한민보사(新韓民報社)에서 적십자회원과 회비를 모집하자 2달러 50센트를 기부하였다. 같은 달 산타 바바라 구역 파출소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0년 2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독립선언기념 경축식에 참석하여 「독립운동의 제2계급에 나온 우리」라는 문제로 연설하였다. 1921년 2월 리버사이드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학교와 교회에서 시무하였다. 이즈음 하와이 와일누아지방 한인전도사로 선출되어 하와이로 건너갔다. 1923년 미국 하와이 감리교 한인부에서 한인들을 위한 어학교과서 편찬을 위해 교과편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태성(李泰成)·현순(玄楯) 등과 함께 교과서 편찬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6년 하와이대한인교민단 총단장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하와이 한인기독교회 평신도 대표회 회장으로 대표회를 개최하였다. 1927년 7월 호놀룰루에서 개최된 범태평양대회에서 한인의 대표자 출석권을 폐지하려 하자, 하와이대한인교민단 총단장 자격으로 김영기와 연서하여 범태평양대회에 항의서를 제출하였다. 1928년 1월 호놀룰루의 대한인교민단 총단에서 개최된 대한인교민단 제8차 의사회에서 다시 총단장으로 선출되어 부단장 손덕인과 함께 교민단을 이끌었다. 그해 2월 하와이 내 한인단체인 대한인교민단과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이를 위해 조용하(趙鏞夏) 등 29명과 함께 대한민족통일촉성회(大韓民族統一促成會)를 조직하기로 의결하였다. 같은 해 4월 촉성회 구성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 27명 중 한 명으로 선임되었으며, 5월 대한민족통일촉성회 창립총회에서 21인의 집행위원이자 서무부 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10월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장 김현구(金鉉九)가 구미위원부 재정 마련을 위해 하와이를 방문하자, 교민단 총단장으로서 김현구와 함께 각지 한인들을 찾아다니며 약 2천 달러의 기금을 모집하였다. 1929년 1월 하와이 한인기독교 평신도대회 제11차 연환회가 열리자, 평신도회 회장으로 연환회를 주관하여 개최하였다. 그해 7월 교민단 총단장을 사임함과 동시에 교민단 기관지 『국민보(國民報)』 주필도 김현구에게 인계하였다. 이즈음 오아후(Oahu)섬 와히아와(Wahiawa) 기독교회 목사로 종교 활동을 하는 한편, 하와이 한인사회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이름을 떨쳤다. 1930년 6월 하와이 한인농촌학생회가 와히아와에서 대회를 소집하자 90명의 회원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그해 12월경 목사 민찬호(閔贊鎬)·홍치범(洪治範)과 함께 와히아와 기독교회를 확장하는데 힘썼다. 1931년과 1933년 와히아와지방에서 개최된 3·1절 기념식에서 연설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1931년 한인농촌학생회가 와히아와 감리교회에서 200명의 학생과 학부형을 초청하여 특별 모임을 열어서, 여기에 참석하여 민찬호·안창호(安昌浩) 등과 「3·1정신에 대한 문제」란 주제로 연설하였다. 1936년 6월 상하이(上海)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韓民)』의 재정 후원을 위해 2달러를 기부하였다. 1937년 2월 하와이국민회 총임원회에서 하와이 한인역사 편찬을 위한 사료 수집을 위해 사료수집위원 38명을 선임하자, 정두옥(鄭斗玉)·박상하(朴相夏)·최선주(崔善周)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같은 해 하와이 한인사회의 중립인사로 꼽히는 민찬호(閔贊鎬)·최선주(崔善周) 등과 함께 하와이국민회와 동지회(同志會)의 합동을 주선하였다. 이후 국민회와 동지회는 몇 차례 비공식 회의를 개최한 결과, 1938년 8월 하와이국민회의 요청으로 동지회와 제1차 합동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총회관에서 열린 합동회의에 합동방침을 강구하였다. 이 합동회의에서 8월 국치기념일 행사를 국민회와 동지회 합동으로 거행하고 합동 절차를 계속 토의하기로 의결하였다. 같은 해 11월 동지회와 국민회 합동을 위한 연합의사회를 구성한 후, 연합의사회 명의로 동지회에 대표회를 소집하였다. 1938년 12월 한길수(韓吉洙)의 외교 활동과 순행 강연을 후원하기 위해 호놀룰루에서 중한민중동맹단(中韓民衆同盟團)이 결성되었을 당시 서기로 선임되었다. 1939년 4월 와히아와부인구제회 창립기념식에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1941년 6월 오하후 서부지방에서 독립금 예약 응모를 위해 오아후서부지방위원회를 조직하자, 국방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는 한편, 4차에 걸쳐 독립금 20달러를 후원하였다. 1942년 1월 하와이 국방부 소속 치안부가 하와이 한인사회에 참여를 요청하자, 치안부 산하에 한인반 집행위원회를 조직하고 10인의 집행위원을 선출하였다. 이때 전경무(田耕武)·이원순(李元淳) 등과 함께 10인의 집행위원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2월부터 12월까지 매달 독립금으로 5달러 등 55달러를 후원하는 외에도 독립운동 예약금 모집에 응모하여 60달러를 납부하기로 응모하였고, 특파원 경비로 100달러를 후원하였다. 같은 해 12월 호놀룰루 거주 미 감리교회 목사 아펜젤라의 집에서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의 전승을 위해 공채 매입을 위한 한미공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공채위원으로 선정되어, 공채 구입을 독려하는 한편 직접 공채를 매입하기도 하였다. 1943년 1월 한미공채위원회에서 선우혁(鮮于赫)과 함께 와히아와 지역 공채판매위원으로 선정되자 2,350달러 공채를 할당받았다. 그해 2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의사부 위원장 이원순의 주관 하에 독립기념 축하식이 거행되자, 여기에 참석하여 연설하였다. 같은 해 4월 전시공채 200달러를 매입하였고, 7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호놀룰루 한인을 중심으로 미국의 국방후원금을 후원하기로 결정하였는데, 이때 후원금 모집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달 한미승전후원금 모집위원으로 선정되어 직접 전시공채 100달러를 매입하였고, 8월 동포를 심방하고 한미승전후원금을 모집하였다. 1944년 3월 오아후 서부연합회에서 3·1절 기념식을 거행하자 경축식에 참가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한편, 3·1금 10달러를 기부하였다. 같은 해 8월 군사금 100달러와 독립금 60달러, 9월 인구세 1달러를 후원하였다.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세계평화안전보장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자, 하와이 대표로 유진석(兪鎭奭)을 파견하기로 하고 미주 한인단체와 연합대표단을 조직하였다. 이에 3월 오아후 서부와 와히아와 한인들이 민중연합대회를 개최하고 후원금을 모집하였는데, 이때 3,300달러를 모집하고 자신도 100달러를 후원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이후, 그해 9월 전후한국구제위원회(戰後韓國救濟委員會)에 한국구제금 100달러를 기부하였다. 1946년 3월 와히아와연합회 주최로 개최된 3·1절 기념식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1946년 4월 고국을 떠난 지 32년 만에 미 군정청의 임무를 띠고 군용 배편으로 환국하였다. 한국에서 미군정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1947년 2월 하와이로 귀환하였다. 1947년 4월 다시 미군정의 전보를 받고 4월 5일 다시 한국으로 갔다. 1948년 우리말 방송을 위해 1달러를 기부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4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김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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