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조
鄭悳朝1872. 3. 8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11)
관련 사건
- · 길성면 장터 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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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11) 1872년 3월 8일 함경북도 길주군(吉州郡) 길성면(吉城面) 길남리(吉南里)에서 태어났다. 잡화상에서 근무하였다. 길주군은 함경북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이 지역의 인사들은 전국적으로 발생하는 일들을 도내에서 가장 먼저 인지할 수 있었다. 더욱이 길주군은 함경북도에서 천도교가 가장 먼저 포교된 지역이었다. 그런 이유로 길주군에서는 1918년 말부터 만세시위의 가능성이 포착되었다. 1918년 말에 길주군 천도교 인사로 창원포(昌源布) 주관도정(主管道正)이었던 김용수(金龍洙)는 박용한(朴庸漢)과 함께 서울에 있는 손병희를 방문하였다. 그 자리에서 손병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에 따른 세계 정세의 변화와 신사조의 등장을 이야기하면서, 장차 조선에서도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김용수는 길주군에 돌아온 후, 길주군 천도교 인사들을 만난 자리에서 손병희의 말을 전하면서 앞으로의 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919년 2월 말, 서울에서 만세시위를 준비한 종교계 인사, 민족지도자, 그리고 학생들은 만세시위의 전국적 확산을 위해서 독립선언서를 각 지역으로 비밀리에 배포하였다. 서울의 천도교 중앙본부에서는 박용한에게 독립선언서를 길주군 일대에 전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런데 3월 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원산시 일대에서 일제 군경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박용한은 교부받은 독립선언서를 불태우는 대신에 그 내용을 모두 암기해서 길주군 천도교 인사들에게 전달하였다. 3월 9일 이용서(李容瑞)의 집에서 회합이 있었다. 그 날 회합에 참여한 이태인(李泰仁)·원세율(元世律)·전용희(全用熙)·이용서는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길주군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심하였다. 3월 11일 길성면 길북동에서 주민 50~1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켰다. 만세시위 직후인 오후 7시경 박서룡(朴瑞龍)의 집에서 만세시위 준비를 위한 모임이 있었다. 원세율·전용희·이용서·천승률·박서룡은 3월 12일 길성면 읍내 장날을 맞이하여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하였으며, 만세시위에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기로 하였다. 한편 그 날 전용희는 독립선언서를 회합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회람시켰다. 3월 12일 길성면 읍내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날 정오 무렵 우시장에서 이태인·원세율·이용서·천승률·김상락·김대용 등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김경찬은 선두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위대를 이끌었으며, 이병룡·박일형·김화용·김봉수·김경찬·김병섭 등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면서 시위대 행진을 주도하였다. 길성면 읍내 장터 만세시위에는 1,000여 명의 시위대가 참여하였는데, 시위대가 우시장에 다시 도착하자, 김상학이 흙더미 위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제 군경은 시위대를 강경하게 진압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7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47명이 연행되었다. 일제 군경에 의해서 3월 12일 길주읍 장터 만세시위에 참여한 혐의로 붙잡혀서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5월 5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과 소요죄로 징역 6월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1919년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또다시 상고하였으나, 1919년 9월 20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하면서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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