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원
鄭德源1862 ~ 미상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애족장(2006)
관련 사건
- · 수안읍 시위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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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족장(2006) 황해도 수안군(遂安郡) 율계면(栗界面) 금촌리(金村里)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62년생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출생월일 및 사망연도는 알려진 바가 없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3월 1일 경성, 평양, 안주, 의주, 선천, 원산, 진남포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 중앙총부는 만세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목적으로 각 지역의 천도교구에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천도교 중앙총부 월보과장(月報課長) 이종일(李鍾一)은 황해도 곡산군(谷山郡)에 거주하는 이경섭(李景燮)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3월 1일 저녁에 이경섭은 수안군(遂安郡) 수안면(遂安面) 석교리(石橋里)의 수안천도교구를 방문하였다. 그는 수안천도교구장 안봉하(安鳳河)를 비롯해서 김영만(金永滿), 나찬홍(羅燦洪), 이영철(李永喆), 홍석정(洪錫楨), 한청일(韓淸一)에게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면서 독립선언서 70부를 전달하였다. 나아가 이경섭은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 수안군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였다. 3월 2일 수안군 내 천도교 인사들은 수안천도교구실에서 모임을 가졌다. 평소 독립을 염원하였던 이들은 3월 3일에 수안읍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3월 2일 오후에 수안헌병분대가 수안천도교구실을 급습해서 독립선언서를 압수하고 현장에 있었던 천도교 인사들을 구금하는 등 일제는 만세운동을 사전에 봉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구금을 면한 교구실(敎區室) 소사(小使) 이영철, 홍석정, 한청일은 천도교인들에게 3월 3일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안천도교구를 통해서 독립선언서를 받았다. 천도교인 및 마을 주민들에게 독립선언서 2~3장을 나누어 주면서, 수안읍 만세시위 참여를 독려하였다. 인근 지역인 금촌리(金村里)의 천도교도 전정석도 수안천도교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1장을 마을 주민들에게 회람시켰다. 그리고 전정석의 주도 아래 율계면(栗界面) 주민들은 수안읍 만세시위에 참여하고자 마을을 출발하였으나, 도중에 일제 수비대에 의해서 저지당하였다. 이에 따라 3월 3일 수안읍 만세시위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수안읍 만세시위는 3월 3일 새벽 6시에 시작되었다. 이영철, 한청일, 홍석정의 주도 아래 130~140명의 천도교도들과 함께 시위대를 형성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를 향해 행진하였다. 오전 11시 경에 100여 명의 시위대와 함께 이동욱과 오관옥의 지휘에 따라 통일된 외침으로 독립을 주장하고, 일제 헌병분대의 퇴거를 외치면서 수안헌병분대에 도착하였다. 시위대가 헌병분대 퇴거를 외치면서 헌병분견소의 경내 및 사무실 진입을 시도하자, 일제 헌병은 시위대를 향해서 총기를 발포하였다. 일제 헌병의 발포 소식이 알려지자, 홍석정, 한청일은 150여 명의 시위대를 이끌고 오후 1시 경에 수안헌병분대로 달려갔다. 시위대가 정문을 통과하자 일제 헌병은 다시 발포하였다. 일제 헌병의 흉탄에 피격되어 홍석정과 한청일은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오관옥도 총탄에 부상당하였으나, 이후 끝내 사망하였다. 3월 4일 일제는 수안군에 소대 및 중대급 병력을 파견하였다. 일제는 수안군 내 만세시위의 확산을 차단하는 한편, 수안읍 만세시위 참여자를 색출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독립선언서 배포 혐의로 일제 군경에 붙잡혔다. 해주지방법원 서흥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자, 이에 상고하였다. 1919년 5월 1일 평양복심법원은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1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였다. 그러자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해서 조선의 독립을 선언했기 때문에 보안법이 적용되지 않는다면서 상고하였다. 하지만 1919년 5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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