鄭洛榮
鄭榮1879. 3. 22 ~ 1947. 2. 16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2)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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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표창(1992) 1879년 3월 22일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금양면(金陽面) 대치리(大峙里)에서 태어났다. 향리에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1919년 3월 18일의 하동군 읍내 만세시위와 3월 20일의 남해군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남해군의 만세운동은 남해 읍내, 고현면(古縣面), 설천면(雪川面) 등에서 다섯 차례 발생하였고, 하동군 만세시위와 긴밀한 연관 관계를 가진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3월 20일 장날에 일어난 남해군 읍내 만세시위는 3월 18일 하동군 만세시위 주도자들이 직접 남해군에 들어와서 시위를 일으키는 독특한 전개과정을 보였다. 이범호(李範鎬)·정재운(鄭在雲)·정희근(鄭禧根) 등과 함께 이와 같은 하동군과 남해군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적량면(赤良面) 면장이던 박치화(朴致和)를 비롯하여 이범호 등과 함께 독립을 위한 만세시위를 계획하여 사전에 대한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제작하고, 읍내의 장날인 3월 18일 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18일 장날을 맞아 하동 읍내 시장으로 많은 군중이 운집하였다. 오후 3시경 박치화·이범호 등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그러자 시장에 모인 다수의 군중이 이에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그러나 만세시위는 출동한 일제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에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의 만세시위에서 다행히 일제 경찰에 체포되지 않았으나, 함께 시위를 주도한 박치화가 체포되었다. 3월 20일 남해군 읍내 장날을 맞아 이범호·정재운·정희근 등과 함께 바다를 건너와서 오후 2시경부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자체 제작하여 하동 만세시위에서 사용한 대한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시장 한복판에서 낭독하였다. 그리고 장날 운집한 군중 속에서 소리 높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시위의 양상을 띠게 되자, 주재소 경찰들이 출동하여 총검을 휘두르며 모여 있는 군중을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리고 시위 주도자 검거에 나섰는데, 결국 이범호와 함께 주도자로 체포되었다. 일제 경찰로부터 모진 심문을 받고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8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았지만, 검사 측이 구법(舊法)에 의거한 형량이 지나치게 가볍다고 항소하였다. 그해 5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검사 측 항소가 인정되어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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