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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태

丁奎台

1890. 11. 12 ~ 1921.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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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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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안(務安)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무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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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건국포장(1992)

관련 사건

  • · 1919년 무안군 외읍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건국포장(1992) 1890년 11월 12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외읍면(外邑面, 현 무안읍) 성남리(城南里)에서 태어났다. 30세 때이던 1919년 3월 20일 무안군 외읍면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외읍면의 만세운동은 무안군에서 3월 18일 장산면(長山面) 도창리(道昌里) 일대에 이은 두 번째 만세운동이었다. 외읍면 만세운동은 지역의 젊은 청년 유지(有志)였던 정순홍(丁淳紅)과 김순기(金順淇)가 뜻을 함께하는 청년 10여 명과 3월 19일 밤 김순기의 집에서 모여, 3월 20일 외읍면 장날을 계기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들은 태극기와 경고문 수십 장을 밤새 만든 후, 새벽부터 외읍면 일대에 배부하였다. 3월 10일 오전 11시, 외읍면 남산(南山)에 주도자들이 모여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을 시작하였다. ‘독립만세’의 함성 소리를 듣고 크게 공감하여 장에 나와 있던 주민들과 함께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정순홍 등의 지휘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의 곳곳을 행진하는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오후 1시 경 200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대와 함께 무안보통학교로 향하여 그 곳에서 경찰과 대치하였고, 이후 다시금 무안 읍내를 돌며 ‘독립만세’를 외치고, 독립의 정당성을 설명하여 일행은 어느덧 500여 명에 달하였다. 이에 목포경찰서에서 증원 병력을 파견하는 등, 일제 경찰은 그 세를 늘려 시위대를 해산하려 하였으나, 시위대의 위세가 등등하여 차마 강제로 진압하지 못하고 지켜볼 뿐이었다. 결국 오후 11시 무렵까지 계속해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다가 해산하였는데, 이후 일제 경찰이 주도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출소 이후 얼마 되지 않은 1921년 1월 23일 3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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