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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식

丁奎植

1897. 10. 5 ~ 1970. 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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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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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무안(務安)3.1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무안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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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2007)

관련 사건

  • · 1919년 무안군 외읍면 만세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2007) 1897년 10월 5일 전라남도 무안군(務安郡) 외읍면(外邑面, 현 무안읍) 성내리(城內里)에서 태어났다. 23세 때이던 1919년 3월 20일 전남 무안군 외읍면에서 발생한 만세시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무안군의 만세운동은 3월 18일 장산면(長山面) 도창리(道昌里) 일대에서 가장 먼저 발생하였다. 당시 전국적으로 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던 외읍면 일대의 유지인 정순홍(丁淳紅)과 김순기(金順淇)는 인근 지역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지자 외읍면에서도 만세운동을 꾸려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이들은 3월 19일 밤, 김순기의 집으로 독립 운동에 뜻을 함께 할 10여 명을 불러 회합하였다. 이 자리에서 바로 다음 날인 3월 20일이 외읍면의 장날이니, 이를 기회로 하여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하였다. 시간이 촉박하였기 때문에 바로 김순기의 집에서 다음날 사용할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친일 세력의 반성과 민중의 궐기를 촉구하는 내용의 경고문을 수십 장 작성하였다. 경고문과 태극기 작성은 밤새 이어져서 3월 10일 새벽 무렵에야 끝났다. 이후 경고문을 나눠 들고 외읍면 일대를 돌아다니며 곳곳에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부착하고, 오전 10시에는 외읍면 남쪽에 위치한 산에 올라 일행들과 다시 접선하였다. 이 곳에서 태극기를 꺼내어 나눠 들고, 함께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며 산을 내려와 외읍면 중심지로 행진하였다. 행진을 하는 내내 ‘독립만세’를 외치며 독립운동의 정당성에 대해서 설파하니, 이에 찬성하는 사람들이 점차 불어났다. 이후 무안보통학교 앞에서 일제 경찰과 대치하다가, 다시 방향을 바꾸어 외읍면 장터 일대를 행진하니 오후 2시 경 그 수가 500여 명에 달하였다. 점점 늘어나는 군중에 놀란 일제 경찰은 지원을 요청하여서, 이후 무안군수와 목포경찰서장이 각기 병력을 끌고 와 다시금 시위대와 대치하였다. 경찰이 시위대를 자극하여 몇몇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지만, 극심한 폭력 사태로까지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후 10시 30분, 밤이 늦자 시위대는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은 이 날 만세운동의 주도자 검속에 나서면서, 경찰에게 붙잡혀 조사를 받고 재판에 넘겨졌다. 1919년 4월 2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후 항소를 하지 않아 그대로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겪었다. 목포경찰서 목포분감에 수감되어 옥고를 겪다가 1920년 4월 28일 특사로 인해 수감 1년여 만에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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