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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용선

田溶璿

1890. 4. 12 ~ 195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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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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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宜寧)3.1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의령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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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애족장(1990)

관련 사건

  • · 3.1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족장(1990) 1890년 4월 12일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용덕면(龍德面) 가락리(佳樂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용덕면 면서기였다. 의령군 읍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의령군의 만세운동은 3월 중순에 거의 매일같이 발생하여 절정을 이루었다. 의령 최초 만세시위는 3월 14일 의령면 읍내 장날에 일어났다. 상경하여 서울 만세운동을 경험하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온 구여순(具汝淳)이 군내 인사들과 계획하였다. 거사 계획에 참여한 인사들은 최정학(崔正學)·정용식(鄭容軾)·이우식(李祐植)·김봉연(金琫淵) 등이었다. 이들은 의령면 읍내 장날인 3월 1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사전준비를 시작하였다. 시위 당일 군중에게 나눠줄 태극기 제작과 독립선언서 등사, 군중을 동원하기 위한 지역별 연락 등 역할 분담을 하였다. 용덕면 면서기라는 신분을 활용하여 최병규(崔秉圭)와 함께 독립선언서의 대량 등사를 맡았다. 등사는 면사무소 등사판과 원지를 사용하였다. 독립선언서를 일제 식민지배의 말단 행정조직인 면사무소에서 수백 장을 등사할 수 있었던 것은 구여순과 최정학이 용덕면 면장 강제형(姜齊馨)을 찾아가 협조를 요청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강제형은 흔쾌히 승낙하고 면서기인 그와 최병규에게 부탁하였다. 일제 군경에 발각되면 엄중한 처벌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역할을 자임하여 대량의 독립선언서 등사를 은밀하게 진행하여 완료하였다. 3월 14일 오후 2시경 시작된 만세시위에도 참여하였다. 만세시위는 의령향교 앞에서 구여순과 남인섭(南仁燮) 등이 차례로 일제 식민 지배를 규탄하고, 독립의 당위성과 시위 참가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군중과 함께 연설에 적극 호응하는 한편으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시위대의 규모는 삽시간에 3,000여 명이 되었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읍내 장터와 중심가를 행진하였고, 경찰관 주재소로 나아갔다. 만세시위는 다음날에도 재개되었고, 이날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전날과 같은 방식으로 시위 주도자들이 의령향교 앞에서 독립의 당위성과 시위 참가를 독려하는 연설을 하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참여 인원은 1,500여 명이었다. 시위대의 선두에서 ‘독립만세’를 외쳤고, 시위대를 이끌고 읍내 중심가와 경찰주재소, 군청을 향해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군내 중심부에서 연일 대규모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일제 군경은 시위 진압과 주도자 색출을 시작하였다. 마산의 일본군 포병대까지 급파되었다. 이후 100명이 넘는 인사들이 체포되어 구금되었다. 이 과정에서 붙잡혔으며, 심문을 거쳐 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7월 25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이른바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았다. 즉각 불복하고 항소하였으나 그해 8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배석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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