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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철

全秉哲

1926. 9. 9 ~ 2010.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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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AI 역사 길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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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밀양(密陽)학생운동

지도 위치

시·군·구 대표 지점

이 위치는 경상남도 밀양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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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2004)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2004) 1926년 9월 9일 경상남도 밀양군(密陽郡) 하남면(下南面) 남전리(南田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옥산(玉山)이다. 9세 때 밀양 하남대사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6학년 때에는 밀양군 내 각 학교와 대전에서 검도·씨름대회에 출전하여 우승과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졸업 후 부산제2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1학년 재학 중인 1940년 11월 23일 중일전쟁에 따른 전력 증강을 위해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제2회 경남학도전력증강국방경기대회(慶南學徒戰力增强國防競技大會)가 개최되었다. 부산 병참기지 사령관 겸 부산상고 배속 장교였던 노다이(乃台) 대좌가 경기의 심판장이었다. 그런데 심판장의 전횡으로 일본인 학교인 부산중학이 우승하자, 한국인 학생 1,000여 명과 함께 항의 표시로 일본국기 하강 시에 「아리랑」을 제창하였고, 식이 끝난 뒤에는 ‘조선독립만세’, ‘일본놈 죽여라’, ‘무엇이 내선일체냐’, ‘무엇이 동아의 맹주냐’, ‘너희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 행진을 벌였다. 학생들은 도청 앞과 대청동을 거쳐 구 부산역에 와서 해산하였으나, 남은 200여 명과 함께 영주동에 있던 노다이 대좌의 관사까지 몰려갔다. 선배들이 관사에 돌을 던져 대문 전등과 유리창을 파괴할 때 돌을 주워다 주었다. 이를 ‘노다이사건’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많은 선배들이 퇴학 또는 투옥되었고, 가메야마(龜山) 교장은 함북 경성(鏡城)중학으로 좌천되었다. 2학년 때인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군사 훈련과 근로 작업은 가중되었고 수학여행은 중지되었다. 이후 철도공장의 철물 정리, 창원군 대산면의 모내기 및 뽕밭 메기, 대두박·콩깨묵 등 하역작업, 적기 고사포 진지 구축 등 근로 작업에 동원되었다. 5학년이던 1944년 9월 초순에는 부산상고·마산상고·울산농고·김해농고 등 학생들과 함께 울산비행장 확장공사의 부수 도로 건설공사에 2개월 간 동원되었다. 하지만 작업 기간이 약속한 것과 달리 길어진 데다 추석마저 집에서 보낼 수 없는 상황이 되자 학생들과 함께 반발하며 평소 불만이던 식사량 부족, 외출 금지, 면회 및 입욕 등 허가 등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들어갔다. 이에 일본인 관리인들이 파업 주도자를 퇴학시키려 하자, 직접 나서서 파업을 중단하고 작업을 마무리한 뒤에 모두 무사히 귀가하자며 학생들을 설득하였다. 그 결과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작업을 단축하여 마무리하였다. 1944년 12월 22일 졸업 후 밀양금융조합 수산지소에 취직하였다. 취직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1945년 1월 21일 울산경찰서 고등계 형사에 의해 일기장, 편지철, 수필집 등을 압수당하면서 울산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재학 중에 동기생들에게 “일본의 패전이 가까워졌다. 만주에도 가지 말고 공군 지원도 하지 마라. 일본이 패전하면 조선은 독립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이 일로 1945년 6월 2일 부산검사국에 송치되어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부산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45년 8월 광복을 맞아 풀려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이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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