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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천

張錫天

1903. 2. 25 ~ 1935.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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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판서 문화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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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莞島)학생운동

지도 위치

시·도 대표 지점

이 위치는 전라남도 완도 지역을 표시하기 위한 대표 지점이며, 실제 출생지·활동 장소의 정확한 지점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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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단체

  • · 조선학생회
  • · 광주청년회
  • · 성진회
  • · 독서회
  • · 전남청년연맹
  • · 신간회
  • · 광주청년연맹

포상 정보

  • · 애국장(1990)

관련 사건

  • · 동맹휴학
  • · 광주학생운동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1990) 1903년 2월 25일 전라남도 완도군(莞島郡) 신지면(新智面) 송곡리(松谷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장인오(張仁吾)이며, 형은 장석지(張錫之)·장석태(張錫泰)이다. 완도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무렵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였다. 재학 중 일본인 교사에게 항의하여 학교를 떠났다.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옮겨 1923년 3월 졸업한 뒤, 수원고등농림학교로 진학하였다. 1925년 11월 조선학생회(朝鮮學生會) 정기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 뒤 사회운동과 관련한 강연회에 참가하였다. 1926년 6월 동맹휴학을 주도하여 무기정학을 당하였다.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에 입학하였으나, 1926년 10월경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광주청년회(光州靑年會)에 가입하면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광주청년회는 ‘대중을 교도하고 투사를 양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광주(光州) 시내 중등학교 중심의 비밀결사 조직과 지원에 주력하였다. 1926년 11월 초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 재학생을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를 지도하였다. 1927년 2~3월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 졸업생 축하 자리에서 졸업 후에도 민족을 위해 분투할 것을 격려하였다. 그해 3월 성진회 해산 이후 성진회 출신 재학생들을 중심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농업학교·전남사범학교에 독서회(讀書會)가 각각 조직되었다. 1928년 6월 이후 동맹휴학이 전개되면서 독서회가 조직체로 발전해 가자 전남청년연맹(全南靑年聯盟) 위원장으로 학생들을 지도하며 독서회를 후원하였다. 1927년 3월 이후 군내 5개의 청년단체의 연합 조직인 광주청년연맹(光州靑年聯盟)에서 활동하였다. 그해 4월 열린 전남청년연맹 정기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자 전남청년연맹과 광주청년연맹 통합을 주도하였다. 1927년 10월 신간회(新幹會) 광주지회가 창립되자 회원으로 가입하였다. 전남청년연맹 지방순회위원으로 광주·화순(和順)·보성(寶城)·고흥(高興) 지역의 청년동맹을 조직하였다. 1928년 1월 전남청년연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학생·소년운동의 옹호, 식민지 교육정책 반대,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실현’ 등을 내걸고 학생층과의 연대에 주력하였다. 그해 4월 광주·송정 등지에 항일문서가 배포되었다. 이 일로 광주경찰서 일제 경찰에 붙잡혀 약 1개월간 고초를 겪었다. 1928년 6월 전남청년연맹 정기대회에서 집행위원회 서무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전남청년연맹에 경제위원회를 신설하고 농촌학교·야학교 설립, 야학교 교과서 제작, 순회지도 강연 등을 추진하였고 학생 독서회를 적극 지도하였다. 이때 신간회 광주지회 간사로 활동하였다. 1929년 1월 독서회 지도 활동에 주력하였다.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광주 내 각 학교의 졸업생들을 만나 항일운동 방안에 관해 협의하였다. 그해 5월 독서회 재정을 지원하기 위해 소비조합을 조직하였으며, 성진회 회원이었던 장재성(張載性)을 학생부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해 6월 이후 전남청년연맹 상무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전남청년연맹 상임집행위원장으로 11월 4~5일 각계 사회단체 책임자들과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때 검거된 학생들의 석방을 위한 제2차 시위 계획이 추진되었다. 나아가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로 결정한 후 투쟁을 효과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학생투쟁지도본부를 만들고 업무를 분담하여 계획을 추진하였다. 신간회 광주지회 상무간사로서 신간회 본부에 광주학생의 시위 소식을 전하면서 광주에 파견된 신간회 집행위원장 허헌(許憲)과 함께 대책을 협의하였다. 이때 시위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킬 계획을 알렸고, 그로부터 신간회 차원에서 적극 협조하고 필요한 경비를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동료들과 함께 11월 12일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11일 「조선 민중이여 궐기하자」라는 제목의 격문 4,000부를 인쇄하여 각 학교 학생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날 밤 장재성·강석원(姜錫元) 등을 불러 제2차 시위운동 계획을 최종 점검하였다. 11월 12일 아침 광주농업학교 교실에서 격문 전단이 배포되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전남사범학교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1929년 11월 17일 서울로 올라온 뒤 서울지역 학생시위를 추진하였다. 차재정(車載貞) 등과 논의하여 격문 살포와 시위운동을 동시에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또한 허헌을 만나 신간회의 동참과 지원을 확인하였다. 11월 20일 15차례에 걸쳐 서울 소재 중등학교의 학생들과 만나 시위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12월 2일 서울 시내 각 중등학교에 격문을 살포하였다. 이 일로 12월 5일 차재정 등 10여 명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0년 2월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김병로(金炳魯)·김용무(金用茂)·김성호(金聲浩) 등이 변호사로 나섰다. 그해 10월 27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았다. 이에 항소하였으나,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던 중 1931년 12월 풀려났다. 풀려난 후 잡지 『봉화(烽火)』를 재발행하기로 하고, 1931년 2월 서울로 올라가 혜화동(惠化洞)에 기거하면서 자금 조달 방법과 전남 연락책을 물색하였다. 1932년 3월 노동운동을 통해 활동을 지속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해 10월 종로경찰서 고등계 경찰에 붙잡혔다. 재판에 회부되어 같은 해 12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겪다가 1933년 4월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그해 11월 7일 질병으로 보석 출감하였으나, 1935년 10월 18일 광주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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