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하
張炳夏1928. 2. 1 ~ 2021. 12. 13
지도 위치
포상 정보
- · 대통령표창(1999)
관련 사건
- · 안동농림학교 조선회복연구단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대통령표창(1999) 1928년 2월 1일 경상북도 안동(安東郡) 도산면(陶山面) 분천동(汾川里)에서 아버지 장덕상(張德相)과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 홍만길(洪萬吉)의 4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경북 안동 목성동(木城洞)에서 성장하였다. 본관은 인동(仁同)이고, 자는 복삼(福三)이며, 호는 운초(芸樵)이다.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궁장정웅(弓長正雄)을 썼다. 인동장씨 남산파(南山派)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손자, 장건(張鍵)의 후예이다. 안동중앙심상소학교(安東中央尋常小學校)를 졸업하고 안동농림학교(安東農林學校)에 입학하였다. 1942년 동료 학생 황병기(黃炳基)·이갑룡(李甲龍) 등과 함께 문학 모임인 상지회(尙志會)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상지회 동지들과 함께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데 뜻을 모았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방송을 청취한 후 일제의 패망을 예상하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을 규합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이준택(李準澤)·장인덕(張寅德)·김우현(金佑炫) 등 수 명의 학생들이 합류하였다. 1943년 여름방학 동안 송탄유(松炭油)의 원료가 되는 관목을 채취하는 강제 노동에 동원되었다. 이때 동료 학생 권영동(權寧東)·고제하(高濟夏)·서정인(徐正寅) 등과 함께 일제가 패망할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일본군으로 전쟁에 끌려가 헛되이 죽기보다는 대책을 마련하자는 결의를 하였다. 그해 8월 대구 동촌비행장 확장 공사에 강제 동원되었던 동료 학생들과 공사 현장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기 위한 활동에 착수하였다. 일제 식민통치에 부당성에 대해 토론하고 독립을 위한 실천 방안을 논의하였다. 1944년 10월 일제가 학생들을 전쟁에 동원하려 하자 이에 대응하여 조선회복연구단(朝鮮回復硏究團)을 조직하였다. 조선회복연구단은 독립전쟁의 일환으로 일제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안동시내의 일본인 기관 및 요인의 습격 등을 투쟁 방침으로 삼았다. 학생과 함께 안동경찰서와 헌병파견대를 기습하여 무기를 탈취하고, 나아가 경북 의성(義城)으로 이동하여 대구에서 출동하는 일본군과 일전을 벌인다는 거사 계획을 세웠다. 이 무렵 안동농림학교를 다니다가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해 일본으로 떠났던 이정선(李貞善)이 귀국하였다. 이정선은 김원봉(金元鳳)의 지시로 파견된 이회술로부터 국내에 비밀결사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받고 귀국하여 1943년 4월 안동농림학교 출신의 김한용(金漢龍)·권오봉(權五鳳) 등과 함께 비밀결사 명성회(明星會)를 결성하였다. 명성회는 회지 『여명(黎明)』을 발간한 후 회원뿐만 아니라 조선회복연구단 단원들에게도 배부하여 두 비밀결사는 한국 독립을 위해 함께 활동하기로 하였다. 1945년 3월 10일 일본육군기념일에 총궐기 계획을 세우고 거사를 추진하던 중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단원들과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고초를 겪던 중 광복을 맞이하여 1945년 8월 16일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54년부터 대구에서 46년 4개월 동안 교직 생활에 헌신하였다. 대구 죽전초등학교교장으로 정년퇴임하였다. 2002년부터 대구경북생존지사협의회(大邱慶北生存志士協議會)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권대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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