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범
姜禹範1884 ~ 미상
지도 위치
관련 단체
- · 간민회
- · 대한독립기성총회
- · 대한국민회
- · 간북남부총판부
- · 고려공산당 북만지부
- ·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
포상 정보
- · 애국장(2012)
관련 사건
- · 국민대표회의
독립운동 활동 기록
공훈 자료에 수록된 활동 기록을 바탕으로 제공합니다.
어려운 낱말은 오른쪽 국어사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애국장(2012) 1884년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출신지는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이며, 아호는 지산(智山)이고, 이명은 강구우(姜九禹)·강부약(姜扶弱) 등이다. 강여성(姜呂成)을 형으로 두었다. 1913년경 중국 옌지현(延吉縣)에서 간민회(墾民會)가 결성되자 가입하여 의사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간도 한인들은 3·1운동을 추진하려고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를 조직하고 산하에 의사부(議事部)·재정부(財政部)·편집부(編輯部)·교제부(交際部)·교통부(交通部)·경위부(警衛部) 등 6부를 설치하였다. 이때 의사부원으로 활동하면서 3월 13일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하루 전날인 12일 중화민국(中華民國) 베이징(北京)정부 외교부 앞으로 독립 선언 운동에 관한 통첩을 발송하였다. 13일 신명덕(申明德) 등 60여 명의 천도교인과 함께 옌지현 룽징(龍井)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룽징에서 많은 사상자가 나와 구춘선·강봉우(姜鳳羽)·고용환(高容煥) 등과 함께 도윤공서(道尹公署)에 항의하였다. 1920년경에는 옌지현 지인향(志仁鄕) 국자가(局子街) 서구(西溝)에 있는 대한국민회 중앙총회에서 회장을 맡았다. 이외에도 대한국민회총부 부회장 겸 옌지현 지인현 의란구(依蘭溝)의 제2중부지방회의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1년에는 간북남부총판부(墾北南部總辦府) 재무관서(財務官署) 재무관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또 같은 해 4월 20일 국민공회(國民公會) 대표 박용만(朴容萬), 하와이 국민군(國民軍) 대표 김천호(金天浩)·박승선(朴承善)·김세준(金世濬), 서간도군정서(西間島軍政署) 대표 송호(宋虎) 등 시베리아, 남·북만주, 하와이 및 국내의 10개 단체 대표가 모여 베이징에서 개최한 군사통일주비회의에서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 대표로 참석하였다. 같은 날 신숙·이장호와 함께 재정위원으로 선정되었다. 5월 23일에는 군사통일주비회의에서 군사 단체의 통일과 군사기관 설립을 위해 군사 조사위원을 각지로 파견할 때, 북간도로 파견되었다. 1921년 말에서 1922년 초에는 대한국민회 중부지방회 회장으로 활동한 경력을 활용하여 북만주 닝안현(寧安縣) 영고탑 부근에서 국민회, 의군단, 산포대 출신의 200여 명을 결집시켜 군사통일회의의 군사기관인 고려공산당 북만지부를 설치하였다. 1923년 1월 3일 국민대표회의 첫 회의에서 자격심사원(資格審査員) 선거가 열리자, 오창환(吳昌煥)·유선장(柳善長)·허동규(許東奎) 등과 함께 대표자격심사의원 5명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다. 두 번째 회의에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할 대표자를 심사할 때 미주 국민회 대표 안창호(安昌浩)에 대해서 심사위원 자격으로 반대 의견을 제출하였다. 미주 국민회(國民會)가 과거 위임통치청원의 혐의를 받는 이상 안창호가 이들과의 관계를 단절한 후에 국민대표회의에 참여해야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월 5일 회의에서는 국민대표회의 분과위원 선거에서 재정분과위원에 당선되었다. 6일에도 과거문제조사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창조파 부속대표로 활동하다가 1923년 6월 베이징에서 임시정부 창조파가 조선공화국을 수립하고 국무위원회와 국민위원회를 조직하자, 대한국민회를 대표하여 국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3년 6월 20일 블라디보스토크 연해현 공산당 중앙위원회 고려부는 러시아에 새로운 정부를 조직한다고 발표하면서 러시아 정부가 160만 원의 차관을 창조파에게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정보를 토대로 1924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국민위원회에 참석하였으나 지원을 얻는 데는 실패하고 상해파 고려공산당원들과도 의견이 맞지 않아 다시 베이징으로 갔다. 1924년 8월에는 베이징에서 돌아와 신숙·김의종·서왈보·한진산·원세훈(元世勳)·송호성·이세영 등과 함께 북경한교동지회를 조직하였다. 1925년 3월 7일에는 북경한교동지회 회원들과 함께 베이징 조양문 내 조선기독교회에서 재류선인유지대회를 개최하고 소일협약 체결에 대해 논의하였다. 1926년 10월 16일 한국독립유일당북경촉성회 선언서에 서명하고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는 안창호가 전선 통일을 위해 독립당을 조직하고자 10월 10일부터 제1·2·3차의 회합을 거쳐 결성한 것으로, 집행위원은 장건상(張建相)·원세훈·조남승(趙南升)·조성환(曺成煥)·배천택(裵天澤) 등 7명이다. 1927년 2월에는 광둥(廣東) 황푸(黃埔) 중앙군사정치학교 촉탁으로 선임되어 간도 지방에 있는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1927년 10월 16일에는 한국인들이 중국에 귀화함으로써 토지소유권 등의 권리를 확보하자는 목적으로 장건상·조성환 등과 함께 입적간민회 창립대회를 개최하고 발기회의 집행위원을 맡았다. 입적간민회를 통해 재중 한인들이 단결하여 정치·경제상의 압박에 저항하고자 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김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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